스페인에 대한 오만정이 다 떨어지게 만들었던 마드리드에서 떠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유종의 미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뭐든 마지막이 좋아야 한다. 아무리 스페인 남부의 강렬한 햇살과 푸른 바다, 맛있는 와인들이 마음에 꼭 들었어도 마지막 도시 마드리드가 너무 구린 기억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스페인에 대한 이미지는 좋게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스페인에 도착했을때만 해도 '드디어 이베리아반도까지 왔구나' 하며 이 여행이 정말 점점 끝을 향해 내닫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 때도 그랬는데, 게다가 지금은 스페인에서 포르투갈을 향해 서쪽으로 곧게 뻗은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니. 정말로 결승점이 가까워져가는 순간이었다. 구글 맵 위의 빨간 점이 서쪽으로 서쪽으로, 스페인-포르투갈 국경에 가까워질 때마다 왠지 심장이 점점 두근댔다.

버스는 스페인-포르투갈 국경을 1km도 채 남겨두지 않은 곳의 휴게소에 멈춰 잠시 쉬었다. 나도 담배를 한 대 물고 두근대는 심장을 좀 진정시켰다. 버스에 나 말고 커플로 보이는 한국인이 두 명 더 있었다. 얼마 전에 갔던 그라나다, 세비야에서도 한국인을 보긴 했었다. 하지만 한국인이 비교적 잘 가지 않는 포르투갈로 가는 버스에서 한국인을 만나니 더 반가웠다. 그래서 말 몇 마디라도 나누면 반갑고 좋을까 싶어 말을 걸까 말까 많이 고민했었지만, 역시나 그러지 않았다. 그들도 분명히 나를 보았고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걸 대충 어림짐작 했을 것이다. 이건 내 생각이긴 하지만, 혼자 온 사람이 두세 명 무리한테 말을 거는 것 보다는 무리가 혼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훨씬 편하다. 특히나 커플같은 경우엔 혼자 온 사람이 말을 걸면 괜히 눈치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들이 나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으로 보아 둘만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서 나도 그냥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예정된 시간을 조금 넘겨 포르토에 도착했다. 하늘에 어스름이 옅게 깔리는 시간이었다. 너무 예뻤다. 마드리드에서 와서 그런지 포르투갈이 원래 예뻐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왠지 포르투갈이 더 정답고 편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집에 들어왔을 때, 엄마가 '고생 많았지?' 라는 말과 함께 안아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달까. 한국에서부터 시작된 이 힘들고 고된 여정의 끝에,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멋을 가진 마지막 나라 포르투갈이 팔 벌려 나를 맞아주었다.

버스 정류장 바로 밑으로 내려가서 지하철을 타러 갔는데, 매표기 앞마다 '도와드립니다' 라고 적힌 듯한 띠를 매고 서 있는 안내원들을 볼 수 있었다. 나이가 꽤 어려보이는 걸로 봐서는 아마도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이 봉사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지하철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그런 모습 같았다. 포르토의 대중교통 표는 우리나라 티머니처럼 충전식 카드를 구매해 충전해서 쓰는 방식인데, 처음 사는 입장에선 뭔가 꽤 어려웠다. 게다가 Zone도 엄청 나뉘어져 있어서, 숙소가 있는 역까지 가려면 어떤 Zone을 골라서 충전해야 하는지도 좀 헷갈렸었다. 아무튼 그래서 영문을 모르고 두리번거린지 정말 단 1초만에 안내원이 도와드릴까요? 라고 묻는 것이었다. 친절하게 어디까지 가냐고 묻고 도와줘서 편하게 표를 끊을 수 있었다.

숙소 직원도 정말 친절했다. 덩치는 나보다도 크고 곰같이 생겼는데,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숙소 이곳저곳을 안내해 주었다. 짐을 놓고선 유심칩을 사러 바로 숙소에서 나왔는데, 자꾸 그 곰같은 주인의 배시시 웃는 얼굴이 떠올라서 나도 왠지 행복해졌다. 아아, 저녁 거리를 걷기만 해도 저절로 행복해지는 포르투갈. 포르투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동네에 있는 핸드폰 매장이 전부 문을 닫았다. 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매장이 하나 있었는데 숙소에서 꽤 먼 곳의 쇼핑센터에 있는 것 같았다. 저녁이 되자 가로등에 불이 켜지고 오가는 사람도 없어서 왠지 운치가 있었다. 천천히 걸어가다 보니 FC 포르투의 홈구장이 보였다. 축구에 큰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만 한국인 석현준 선수가 이 팀에서 뛰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카메라를 들었다. 마치 한국인을 본 기분이 들었다. 나는 외국에서 한국인끼리 몰려다니는 것, 국뽕, 국적 따지는 것 등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한국인이긴 한지 그런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런 으리으리한 쇼핑몰은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단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 그나마 비슷한 곳을 꼽자면 모스크바에 있던 굼 백화점 정도? 거기도 크긴 컸는데 이런 최신식 디자인은 아니었다. 구조로 보나 규모로 보나 딱 여의도의 IFC가 연상되는 쇼핑몰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포르투갈이 그렇게 잘 사는 나라가 아니라고 알고 있었기도 하고, 워낙 건물 입구 주변에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 들어가기 전까진 이렇게 좋은 곳일줄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조금 놀랐다. 월요일 저녁이라 그런가 싶기도 하고.

여튼 유심칩도 꽤 싸게 샀다. 15유로에 무려 15기가짜리 유심이었다. 야구 중계도 보고 음악도 계속 스트리밍하는데 문제가 없겠구나. 직원도 매우 친절했다. 이 다음에도 마찬가지지만 포르투갈에서 불친절함이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 여행자의 천국 포르투갈이여.

아예 저녁도 이 쇼핑몰에서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푸드코트에 들어가니 역시나 익숙한 버거킹이 눈에 띄었다. 이제 와서 생각이 드는 거지만 대체 그 동안 여행하면서 버거킹이 없었다면 뭘 먹고 살았을까? 왠지 도시마다 한 번 씩은 버거킹에 간 것 같다. 아무리 돈이 없다지만 싼 식당을 찾아볼 생각도 안 하고 그냥 패스트푸드로 때우려는 나도 대책없고 또 애처롭다.


다음 날 아침엔 먼저 시장에 갔다. 분위기나 생김새는 완전한 로컬 시장 느낌이었지만 기념품을 파는 곳도 많고 관광객들도 꽤 많았다. 대부분 저 포르토 와인 미니어처 병을 기념품으로 팔고 있었다. 기념품은 엽서 말고는 웬만해선 눈길도 안 주는 나지만 저 미니어처는 정말 많이 탐났다. 집 책상에 미니어처 몇 병을 줄 세워놓은 게 있는데 거기다 같이 놓고 싶었다. 투명한 병 하나와 까만 병 하나씩을 샀다. 가격도 2개 3유로에 사서 엽서보다 가격 대비 좋은 기념품 같았다.

여담이지만 뭔가 '액체류'가 기념품으로 꽤 좋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석이라던가 여타 다른 고체인 기념품보다는 흔들면 찰랑거리는, 뭔가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액체류 말이다. 그 곳에서 흐르던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만 같은 그런 느낌. 만약 세상의 끝에 가서 그 곳의 바닷물 한 병과 돌멩이 한 개 중에 하나만 가져올 수 있다면 뭘 가져오겠는가? 아마도 대부분은 전자를 택할 것 같다.


상벤투(Sao Bento) 역은 포르토의 중심 기차역인데, 역 건물 안의 벽들이 모두 아줄레주(Azulejo) 라는 채색타일로 가득 메워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줄레주는 포르투갈어로 '작고 아름다운 돌'이라는 뜻인데, 타일에다가 파란색 유약으로 섬세한 그림을 그려넣은 것을 말한다. 포르투갈에서는 어딜 가나 건물 바깥이든 안이든 저 아줄레주로 벽을 채워넣은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상벤투 역은 그 중에서도 특히 거대한 규모의 아줄레주 그림이 있어서 그것만 보기 위해 역을 찾는 사람이 많다. 역 안에 들어가면 죄다 카메라를 들고 저걸 찍고 있다.


상벤투 역 바로 앞에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맥도날드가 있다. 외관만 보고는 '에이 큰 독수리 하나 간판 위에 서있는 거 보고 세계에서 제일 예쁘다고 하는건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안에 들어가서 쩍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샹들리에에다가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 맥도날드.. 실화입니까? 이렇게 고풍스러운 맥도날드 안에서 최신식의 자동주문기로 주문을 하고 1분만에 나오는 음식을 먹는 광경이라니.. 이질적이면서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물론 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으니 빅맥 세트를 하나 시켜 먹었다.


맥도날드 바로 앞에서는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드럼, 색소폰 이런거야 흔히 본다고 해도 저 파이프로 만든 악기는 진짜로 신기했다. 한번도 듣도보도 못한 형태의 악기였다. 돈을 넣으면 저렇게 헤이~ 하는 리액션도 너무 웃기고. 도저히 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애기들도 헤이~ 소리를 한 번씩 듣고 싶었던지 저렇게 몰려가서 돈을 넣는 모습도 너무 귀여웠다. 그냥, 정말로 포르투갈에 있는 모든 것은 너무 정겹고 흥이 나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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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행기가 '대학내일'이라는 잡지에 실렸다. 

https://univ20.com/69050


아래는 이 일에 관해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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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어떤 선택지를 골라야 할 지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주로 진로에 관한 문제이겠죠. 제 주변에 있는 많은 분들보다 전공에 대한 열정도, 실력도 특출난 것 같지 않아 걱정이기도 하고요. 조급해 할 필요가 전혀 없는 나이라는 걸 알지만 졸업을 앞두고 마냥 마음을 편하게 먹는 것도 쉬운 게 아니네요.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인생은 그래도 순탄하게 잘 굴러갔다고 생각합니다. 약간의 노력에 운이 따랐고,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기도 해서 인생의 큰 고비들을 잘 넘겨 왔습니다. 고입, 대입 때가 그랬고, 휴학 때 좋은 곳에서 인턴 생활도 하게 되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표로 하는 이런 것들을 무사히 이뤄낼 때면 짜릿함과 안도감이 뒤섞인 기분을 느끼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 고비들을 잘 지나고 나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고 방황을 할 때도 많았습니다. 기모찌한 것도 오래 가지 않았고 오히려 무력함과 권태감을 느끼고는 했죠.

그럴 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에 한 번 귀를 기울여 보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뤄낸 것, 내가 다니는 학교와 전공, 남이 나를 보는 이미지와 나에게 기대하는 것 말고 제가 정말 뭘 원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고민해 보았습니다. 저는 여행을 좋아하고, 또 글을 쓰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벌어 두 번의 여행을 다녀오고 블로그를 만들어 여행기 등을 끄적이기 시작했습니다.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지하철에선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나와 비슷한 대학생 여행자 블로거가 책을 내는 것을 보고 나도 여행작가가 되고 싶다는 상상을 매일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새 머릿속에서는 이미 여행작가가 다 된 것 마냥 김칫국 드링킹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정말 김칫국 드링킹으로 끝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개나소나 여행작가 하나요? 저에겐 이미 4년을 배운 전공이 있고 그걸 바탕으로 세운 20대의 인생 계획이 있습니다. 전 갑자기 여행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해서 가족들과 주변의 바람, 앞으로의 제 인생에 대한 책임 그 모든 걸 못 본 채 하고 급커브를 할 깡다구를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게 대학원을 다니고 병특을 마치고 회사 생활을 하게 되면 이런 꿈도 언젠가 서서히 흐려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정말 아무 기대 없이 응모해 본 이 주간 잡지의 두 장짜리 코너에 제 글이 실린 이상 언제까지고 이 꿈을 놓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내 글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잡지에 실리고, 고작 5만원이지만 내 글에 대한 대가를 받은 이 경험을 쉽사리 잊을 수 있을까요? 내 글과 사진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응모한 사람이 적어서 뽑힌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건 그렇게 중요치 않았습니다. 고입과 대입에 성공했을 때 만큼의 쾌감은 아니지만, 나의 진짜 꿈을 이루기 위한 한 발짝 첫 걸음을 내딛었다는 생각에 이토록 두근댈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제일 자랑하고 싶은 일을 꼽으라면 이 여행을 다녀온 것과 이 잡지에 글과 사진을 실은 것이라고 말할 것 같아요. 별 거 아니게 보일 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이렇게 주절주절 거리면서 자랑하고 싶었어요 ㅎㅅㅎ

아마 그 동안 다른 뭔가를 성공했을 때와는 달리 이 잔잔한 행복과 두근거림이 마음 속에 오래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여러분도 이런 두근거림을 느끼며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과 기사를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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