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도바에 도착했다. 세비야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는데 여기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아니, 정말 한산하다 싶을 정도로 적었다. 은근 관광지로 유명한 동네인 줄 알았더만, 썰렁한 분위기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숙소에 짐을 풀었다. 침대에 시트가 없어 주인에게 물어봤더니 시트는 따로 사야 한단다. 예약사이트 어디에도 그런 말이 없었지만 땀이 질질 흐를 정도로 더운 마당에 따질 힘도 없었다. 고분고분히 돈을 내고 시트를 깔고 있는데 옆 침대에 정말 작은 체구의 여자가 한 명 들어왔다. 둘이서 어색한 침묵을 견디다가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Where are you from?"

홍콩에서 왔단다. 지금껏 여행하면서 홍콩 사람을 두 번 만났다. 한 번은 러시아에서 만난 첸, 또 한 번은 플리트비체에서 만난 코비와 그의 여자친구. 세 사람 모두 정말 말할 수 없이 착하고 매너있고 활기찬 친구들이었다. 아무튼 홍콩 사람들이 중국 사람들을 죽도록 싫어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한 마디 건넸다. "Then you're not a 'Chinese', right?"

역시나 뛸 듯이 좋아하며 그 말을 반긴다. 홍콩이나 대만 사람에게 저 말 한 마디만 하면 난 이미 정신적으로 온전히 그들의 편이다. 조금 얘기를 나누다가 저녁에 숙소에서 다시 만나 맥주나 한 잔 하자고 한다. 좋다고 하고 혼자 길을 나섰다.

코르도바에서 제일 유명한 곳은 아마 이 메스키타일 것이다. 스페인에 현존하는 유일한 큰 모스크라고 한다. 그리고 입장료는 무려 8유로고. 저 정도면 거의 하루 밥값이다. 결국 또 고민에 고민을 한 끝에 안에는 들어가지 않고 개방된 정원이나 돌기로 했다. 별달리 채색도 없고, 흙빛의 외벽 건물에 야자나무가 적절히 조화되니 어딘가 이집트에 온 느낌이 들었다. 그저 한 30분이면 넉넉히 돌아볼 수 있는 정도였지만 그나마 벽의 장식들이 개성있고 섬세해 그렇게 심심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 나의 메스키타 구경은 끝이었다. 솔직히 이 메스키타 말고는 코르도바에 올 이유가 딱히 없는데, 이럴거면 정말 왜 왔나 싶다. 역시 여행은 넘치진 않더라도 적당한 돈을 들고 가야 한다.

잡설이지만, 요즘엔 TV나 잡지 등에서 '단돈 얼마 들고 세계여행 한 사람' 따위의 인터뷰나 다큐 등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끼니를 몇 차례 굶고, 예수도 아닌데 마구간에 버금갈 만한 싸구려 숙소에서 잠을 청하며 하루하루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행복과 흥분을 느끼는 듯 한 변태스러운 극한 여행자들의 이야기 말이다. 그런 건 전혀 나같은 범인(凡人)들은 따라할 만한 것이 아니다. 여행을 즐기러 왔으면 즐기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은 들고 떠나야 한다. 한 때는 누구는 100만원 들고 떠나서 1년을 가까이 여행을 했다는데, 나는 550만원 예산으로 3달 여행하면서 너무 불평하고 징징대는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그건 아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집 소파에서 쪽잠을 청하며 빵 한 쪼가리를 세 끼에 나눠 먹어도 , 낯선 사람, 낯선 풍경과 친해졌다는 그 행복감으로 모든 욕구의 결핍을 상쇄시킬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난 아니다. 난 적어도 그 도시의 유명한 음식 하나쯤은 한 끼라도 먹어보고 싶었고, 그 도시의 대표 관광지 하나 정도는 입장료 걱정 없이 실컷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특산물은 커녕 버거킹에 가서도 와퍼도 아니고 고작 2유로짜리 조그만 버거와 너겟밖에 먹을 수 없어 배도 충분히 못 채웠다 (배가 고프면 좋을 것도 짜증난다). 그리고 제일 유명한 대표적 유적지마지 들어가지 못해 주변을 빙빙 돌았다.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괴로운 나날들이었고, 그런 생각에 특히 코르도바에서 많이 우울했던 것 같다. '나는 왜 여행을 왔는가?' 라는 물음이 머릿속에 어지럽게 울려서 말이다.

하지만 이미 일은 이렇게 흘러온 거고 뭐 어쩔 수도 없었다. 우울하고 할 것도 없는데 담배나 태워야지 하는 순간 담배가 없었다. 구시가에서는 담배를 파는 곳이 없어서 조금 걸어 쇼핑몰이 있는 쪽으로 갔다. 거기서도 담배가게를 잘 찾을 수가 없어 구글 지도로 검색을 하고 한 세 군데를 찾아가봤는데, 전부 문을 닫았다. 담배가게 뿐만 아니라, 시내의 모든 가게가 빠짐없이 전~부 문을 닫고 사람은 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뭐야 이거? 무섭기까지 했다.

알고 보니 악명높은 스페인의 시에스타 때문이었다. 솔직히 작렬하는 햇살이 너무 뜨거워 이해가 안 됐던건 아니다. 그러나 코르도바 같은 비교적 큰 도시의 중심부가 이렇게나 고요해질 만큼 시에스타를 철저하게 지키는 건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유일하게 스페인의 전국 체인 슈퍼만 열어서 담배 대신 정말 달고 싸고 맛있는 납작복숭아나 잔뜩 사서 우물대며 먹었다. 참고로 스페인에 있는 내내 하루에 납작복숭아 몇 개 씩은 꼭 먹었다. 정말 싸면서 엄청나게 달고 먹기도 편하다.

다시 구시가로 돌아와서 아까 둘러봤던 메스키타를 지나자 코르도바를 관통하는 과달카비르 강이 보였다. 강 색깔마저 흙빛이었는데 묘하게 주변 풍경과 잘 어울리긴 했다.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 앞에는 뜬금포 디자인의 문이 있었다. 로마가 딱 이런 분위기였다. 주변에 뭐가 있던간에 상관없이 갑자기 뭔가 기둥이 우뚝 서 있고 문이 우뚝 서 있고.. 그런데 실제로 이 다리의 이름이 '로마인의 다리' 였다.

코르도바에서 또 유명한 것은 바로 이 꽃의 골목 이었다. 지도를 보면서 헤매다가 꽃의 골목으로 보이는 곳에 딱 들어섰는데, 꽃은 말라 비틀어져 초록색 이파리만 무성할 뿐이고... 그래도 꽤 유명한 관광 스팟인데 꽃 상태가 이렇다면 뭔가 관리를 해놨을 것 같은데... 여기가 아닌가...? 아니다 맞았다. 여기가 꽃의 골목이었다. 엑.

저녁이 되고 숙소에서 만난 홍콩 여자애와 같이 맥주를 마시러 갔다. 자기가 아는 데가 있다고 꽤 먼 거리를 데리고 갔다. 가서 맥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너네 나라 남자애들은 무조건 군대를 간다는데 너도니? 얼마나 길게 가니? 꼭 가야 하니?' 이런 질문은 필수로 받는다. 대답하는 레파토리도 이제 다 정해져서 외워버릴 지경이었다. 마치 토익 스피킹 대답하는 것 같달까. 원랜 그런데 안갈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박사 하나는 석사따고 회사 어쩌구 저쩌구... 윽. 그런 기본 문답들을 끝내고 홍콩 얘기를 하다가 좀 충격적이면서 안타까운 얘기를 들었다. 홍콩 사람들의 여권에는 국적이 중국이라고 적혀 있단다. 때문에 숙소 같은걸 예약할 때 국적을 홍콩으로 골라도 여권이 중국이라서 '너 중국사람이니?' 라고 묻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참.. 나같으면 마음이 어떨까 싶기도 하고. 많은 위로를 해 줬다.

메스키타의 밤 풍경은 이랬다. 온통 흙빛이던 이 거대한 벽도 불빛을 받으니 나름 로맨틱하긴 하군.

다음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시 마트에 가서 납작복숭아를 사 먹고 담배를 피우고 버거킹에서 허기를 때우며 침대에 누워 자고 핸드폰을 했다. 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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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8 45.28€ (방값 25€)
7/29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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