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로 출발하는 날 그라나다 숙소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버스 출발 시간을 확인해 보니 내가 기억하고 있던 출발 시간보다 2시간이나 빨랐다. 스위스에서도 그랬는데 이런 실수를 또 하게 되다니. 안 그래도 부모님에게 돈을 더 받아서 최대한 아껴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또 허망하게 돈을 날리게 되었다. 결국 그냥 힘이 빠져 늘어지고 어제 술을 같이 먹었던 한국인 여자애(이하 Y)와 같이 오후까지 있었다. 기념품을 사러 간다고 해서 나도 같이 구경갔다가 그라나다 대성당도 보았다. 생각해 보니 여기도 안 둘러봤구나.

3시 반에 버스가 있다길래 시간 맞춰서 갔는데 표를 살 수 없었다. 그냥 4시 반에 출발하는 비싼 표를 샀다. 그래도 국제학생증 할인이 되는지 몰랐는데 Y가 알려줘서 5유로나 싸게 살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돈은 3시 반 티켓을 사는 것보다 5유로 정도 좀 더 썼지만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우등 버스였는데 자리도 엄청 넓고 편하고 간식으로 빵이랑 물도 줬다.

일곱시가 넘는 시간에 도착했음에도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마치 열풍이 부는 듯 엄청나게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역시 세비야다. 그래도 역시나 습하지는 않아서 불쾌한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숙소는 세비야 대성당이 창문 밖으로 보이는, 완전히 중심가에 있었다. 아마 숙소 시설로는 지금까지 간 곳 중 가장 좋지 않을까 싶었다. 삐걱거리고 흔들리는 허접한 이층 침대가 아니라 캡슐형의 편안한 침대에다가 에어컨은 거의 추울 정도로 빵빵했다.

2~30분 정도 걸어 숙소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나와서 Y가 준 라면으로 허기를 때웠다. 컵라면에서 뺀 면 두 개에 스프 두 개를 큰 그릇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먹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먹은 라면 이후로 거의 처음인 듯 했다. 정말 맛있었다. 맛이란 음식 자체가 가진 성질만이 다가 아니다.

스페인 광장 야경이 이쁘다고 해서 해가 질 시간에 맞춰 찾아갔다.

남부의 도시 어딜 가나 저녁이 되면 건물들이 붉은 빛으로 물드는 것이 정말 장관이다. 게다가 스페인 광장에 있는 건물은 양 옆으로 길게 원형으로 뻗어 있고 양 끝에 탑이 있어 더 위용을 뽐냈다. 가운데엔 호수가 있고 붉은 빛과 어울리는 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사람들이 나와 사진을 찍고 휴식을 즐기고 있어 적당하게 흥이 났다. 기분이 좋았다.

건물의 앞에는 이렇게 타일모자이크로 스페인의 역사적인 사건을 그려낸 벤치 비슷한 것이 주우우욱 늘어져 있다. 가까이 다가서서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타일에다가 어떻게 이렇게 세세하게 그림을 그려낼 수 있는지.

밤이 되고 광장에는 가로등 불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장노출로 멋있는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삼각대가 없어서 적당히 의자에 올려놓고 찍어야 했다. 때문에 탑을 담으려면 카메라를 위로 기울일 수 밖에 없어서 구도가 조금 이상하게 나오게 되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출출해서 버거킹에서 너겟과 음료수를 사 먹었다. 4.48유로 어치를 사고 5유로짜리 지폐를 내밀었는데 자리로 돌아와서 거스름돈을 보니 0.52유로가 아니라 4.48유로였다. 어딘가 주문을 받을 때 부터 조금 어리숙한 모습이었는데, 정신이 없어서 주문 금액을 거스름돈으로 보고 준 듯 싶었다. 이걸 사실대로 말하고 돌려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말 엄청나게 고민을 했다. 고민을 하다가 그냥 돈을 들고 나왔다. 양심의 가책이 엄청나게 느껴졌지만, 1유로가 아까워 물도 함부로 못 사 먹는 내 처지가 더 딱했다. 이 일로 인해서 세비야에 있는 내내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점장에게 깨지는 초보 알바 아저씨의 모습이 상상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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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은 타파스 투어를 한다는 미명 아래 하루 종일 와인과 샹그리아, 맥주에 절여 지냈다.

타파스는 위에 보이는 것처럼 작은 접시에 소량 내오는, 술과 곁들여 먹는 음식이다. 타파스를 주는 바나 술집 등을 여러 군데 찾아다니면서 술 한잔씩 시키면 딸려 나오는 타파스를 맛 보는 것을 타파스 투어라고 하는데, 그라나다는 특히 물가가 싸고 타파스를 제공하는 좋은 술집이 많아서 타파스 투어를 하기 아주 제격인 곳이다.

한 4~5군데 정도를 돌아다니며 와인과 샹그리아, 타파스를 맛본 것 같은데, 짤막한 후기를 적어 놓았다.


1. EL ORIGEN

위에서 3번째 사진이 EL ORIGEN에서 찍은 사진이다. 와인 작은거 2유로. 분위기 깔끔하고 인테리어도 깨끗하다. 타파스 종류가 많고 영어 메뉴도 잘 되어있다. 직원도 친절하다. 하몽 샌드위치가 맛있었다. 와인에 얼음을 넣어서 주는데, 그것 때문에 맛이 없지는 않다. 신선한 맛이었다. 단점이라 하면 사진에서 보이듯 음료의 양이 조금 적은 감이 있다.

2. Bedegas Castaneda

위에서 4번째 사진이 Bedegas Castaneda에서 찍은 사진이다. 와인 한 잔 2.8유로. 사람이 많다. 빠에야에 국물이 좀 많다. 하몽이 엄청 얼려져 있고 좀 왁자지껄하다. 하몽을 만드는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숙성시킨 것을 천장에 막 걸어놓았다. 활기찬 것을 좋아하고 로컬 술집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추천할 수 있지만 나는 그냥저냥이었다.

3. Casa de vinos La Brujidera

여기는 그라나다를 다시 찾게 된다면 무조건 다시 갈 만큼 만족했던 곳. 마지막 두 장의 사진이 여기서 찍은 사진이다. 와인 한 잔에 2유로 대인데, 먼저 찾는 와인이 있냐고 묻기도 하고, 이건 어떠냐고 물어보면 친절히 시음까지 시켜준다 (그저 2유로짜리 한 잔 시키는 것일 뿐인데!) 타파스는 고를수가 없고 주는대로 먹어야 하는데, 정말정말 와인과 어울리는 타파스를 내 준다. 다른 곳은 와인 따로 타파스 따로 먹는 느낌이었다면 이 곳은 세트메뉴로 정말 궁합이 맞는 음식을 함께 먹는 느낌이었다.


도착한 날에 내가 늦은 시간 숙소에 돌아오니 내 밑의 침대에 내 또래 한국인 여자가 와 있었다. 사실 나는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을 만나도 한국인이냐고 먼저 묻지 않는데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걸어 주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내일 저녁에 같이 맥주 한 잔 하는게 어떻냐고 묻는다. 거절할 이유가 없어 당연히 좋다고 했다. 베니스에서 한인민박을 이용한 뒤로 정말 오랜만에 한국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술 한잔 하며 얘기를 하게 되었다.

처음엔 간단히 맥주 한 잔씩을 시키고 타파스를 먹었다. 맛이 꽤 괜찮아서 여기서 더 먹을까 하고 아예 소세지 요리 하나와 맥주 한 잔씩을 더 시켰다. 이미 낮에 와인을 잔뜩 먹고 온 데다가 맥주까지 연거푸 먹으니 얼굴이 벌겋게 취해서 두 번째 사진은 찍으면서도 손가락이 렌즈를 가리는 줄도 몰랐다. 아무튼 같은 공대생이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많이 먹었다고 계산을 하고 나니 마지막엔 저렇게 깜찍한 후식도 주었다.

다음 날 일어나보니 뭔가 숙취가 있는 것 같았다. 술은 엄청 먹었으면서 물은 거의 마시지 않은 탓인지 목도 엄청 마르고 피가 걸쭉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온 몸에 피가 안 돌고 몸이 무거운 느낌이었다. 계속 침대에 누워만 있다가 2시쯤 나와서 엽서를 부치고 슈퍼만 갔다가 왔다. 어제 갔던 훌륭한 와인 바(위의 3번)를 다시 한 번 가고 싶었는데 숙취 때문에 도저히 다시 가서 술을 먹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어제 같이 술을 먹었던 여자애가 자기는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한식이 많이 남았다면서 나에게 다 주고 갔다. 건네준 쇼핑백에는 라면 2개와 깻잎, 짜장, 누룽지, 팥죽에 한 달 치 하루견과가 들어있었다. 정말... 구세주가 나타난 느낌이었다. 이 건네받은 식량은 여행이 끝날 때 까지도 요긴하게 잘 먹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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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3 66.46€ (방값 46€)
7/24 21.8

7/25 1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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