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의 일이다.

잠깐 아빠를 따라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다. 교회에 나가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에서 수련회를 가게 되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그때는 특히 낯을 좀 많이 가리는 편이었어서, 수련회를 갈 당시엔 친하다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딱히 무슨 프로그램을 하는 시간이 아닌 이상에는 난 거의 항상 혼자였다. 그런 나를 집중마크하라는 중고등부 임원들의 미션이 있었는지, 나보다 두세 살 많은 어떤 형이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케어해주게 되었다. 밥을 먹을 때도, 휴식시간에도 나에게 계속 말을 걸고 같이 있어주었다.

왠지 모르게 그런 그 형의 행동이 싫었다. 그래서 나에게 말을 걸어줘도 그저 짧은 대답만 하고, 불편하다는 티를 많이 냈었다. 심지어는 나중에 가서 '나는 형이 이렇게 나를 따라다니는 게 사실 조금 불편해요' 라고 돌직구까지 던지게 되었다. 머리를 긁적이던 그 형의 무안한 표정이 아직도 흐릿하게 기억이 난다.

그 때는 내가 왜 그런 호의를 불편하게 생각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난데없이 이 일이 생각이 나서 곰곰히 고민을 해 보니 왜 그랬는지 어느정도 알 것도 같다.

아마 그 형의 오로지 나를 위한 순수한 호의가,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나의 못난 마음을 비췄던 거울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 호의로 인해 '너는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사귀지 못하고, 누군가의 특별한 조치를 필요로 하는 성가신 존재야!' 라는 마음아픈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던 게 불편했던 건 아니었을까.

남에게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쉽다. 대개 나쁜 일은 누구에게나 나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담 좋은 일은 무엇일까? 아무리 좋은 일이고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는 일이어도 이렇듯 받아들이기에 따라 불편하기 나름이리라. 좋은 사람이 되기 한층 더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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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일어나 피렌체행 기차를 탔다. 전날 이탈리아와 독일의 경기를 보고 늦게 자서 몇 시간 못 잔 탓에 기차에 몸을 싣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이 떠졌는데 피렌체에 도착하기 정확히 3분 전이었다. 운이 좋았다.

그것 말고도 운이 꽤 좋은 날이었다. 아침 일찍 온 탓에 조식 뷔페를 먹을 수 있었다. 이 곳의 조식 뷔페는 호스텔답지 않게 빵, 시리얼, 우유, 주스 등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파스타, 볶음밥, 스크램블 에그, 소시지볶음 등등 따뜻한 음식까지 한껏 차려져 있었다. 아침식사를 최대한 늦추어 아점으로 만들고 저녁식사를 최대한 앞당겨 점저로 만들어 두끼만 먹고 사는 나에게 이런 뷔페는 그야말로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바로 이 날이 한 달에 한번 있는 우피치 미술관 무료입장 날이었다. 누누히 적는 말이지만 나는 종교미술에는 큰 관심이 없고 우피치 미술관은 입장료도 꽤 되는 편이라 원래는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무료개방이라고 하니 한 번쯤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식을 먹고 거리로 나왔다.

로마와는 다른 낡은 색감의 느낌이 가득 찬 거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로마와는 확연히 느낌이 달랐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내가 사는 도시인 양 친근한 감정이랄까.


우피치 미술관으로 가는 길목에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 보였다. 두오모로 더욱 널리 알려진 곳이다. 어마어마한 크기와 화려함에 압도당했다. 보통 저 높은 탑인 조토의 종탑에 많이들 올라가던데 너무 비싸서 올라가지 않았다.


조금 더 걷다보니 시뇨리아 광장과 베키오 궁전이 나왔다. 지금껏 흔히 본 건물 모양은 아니라 신기했다. 보통 저 높은 탑인 베키오 종탑에 많이들 올라가던데 너무 비싸서 올라가지 않았다.


더 걸어가니 드디어 우피치 미술관이 나왔다. 역시 무료개방일의 클라스를 증명하듯 줄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일찍 도착해서 시간도 많고 할 것도 없어 그냥 야구 중계나 보면서 줄을 섰다.

하지만 줄이 아무리 길다 해도 사람이 줄어드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그래서 입구를 자세히 보니 사람들이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의 관람객 수를 조절하는 모양이었다. 나라 크기는 제일 작은 주제에 쌩 양아치같은 모습을 보인 바티칸 박물관의 무책임과는 차원이 달랐다. 티아모 피렌체.


줄 서는건 힘들었지만 들어와서는 매우 쾌적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내 마음에 드는 작품은 별로 없었다. 기억나는 것은 '비너스의 탄생'과 3층 창문에서 바라본 피렌체 전경밖에 없었다. 그래도 악랄한 바티칸 박물관 다음으로 이 곳에 오니 그저 널널하게 관람할 수 있는 미술관에 왔다는 사실 자체가 기분이 좋았다. 역시 인간은 합리적이지 못하며 그 놈의 '상대성'이 눈을 멀게 만든다.

미술관을 나와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숙소에서 조금 쉬고 그 유명하다는 피렌체의 야경을 보러 나왔다. 가는 길목에 베키오 다리가 있었다.


특이한 모습이었다. 해질녘의 금빛 햇살을 받아 더욱 멋진 모습을 연출했다.


해가 정말로 멋있게 지고 있었다. 어떤 커플이 스냅사진을 찍는 듯 보였다. 많이 부럽기도 하고 그 장면 자체가 너무 멋있기도 했다. 커플을 정면으로 담았다면 좋았을텐데 몰래 찍는 입장이라 옆에서 담았다. 정말로 너무 예쁜 장면이었다. 정말 진짜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사진 속의 주인공이시거나 주인공을 알고 계시는데 사진을 여기 올린 것이 불쾌하시다면 알려주세요.)

다리에서도 2-30분을 걸어 미켈란젤로 언덕에 도착했다. 피렌체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여기 안 올라왔으면 저 비싼 두 종탑에 올라가지 않은 것이 후회됐을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사진으로 본 종탑에서의 전경과 언덕에서 본 전경이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종탑에 올라가 보는 것이 더 좋다고 해도 10유로씩이나 내고 거기서 보느니 공짜로 언덕에 올라와 보는 것이 더 좋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도로에 가로등이 켜지고 베키오 궁전에 조명이 들어왔다. 실로 아름다운 야경이었다.


한국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특이 두셋이서 온 여자들이 많았다. 제일 예쁜 원피스를 차려입고 와서 서로 사진을 수십장씩 찍어주고 맥주를 마시고 얘기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부러웠던 건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초록 단색 티셔츠에 검은 츄리닝 반바지를 입고서 머리도 못 감아 떡이 된 나는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여행자였다. 나같은 꼴로 여행 다니는 한국 대학생은 없었다. 아름다운 야경과 겹쳐 외로운 마음이 들었다.

전날의 외로움 때문인지 그냥 몸에 피로가 쌓인 탓인지 다음날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굳이 묘사하자면 크레파스를 잡는 법을 막 배운 아이가 스케치북에 아무렇게나 그은 낙서 같았다고나 할까. 그래도 피렌체의 그 유명한 티본스테이크는 먹어봐야지 해서 열심히 검색을 해 보았다.

보통 티본스테이크 맛집은 2인분부터 파는걸로 보였다. 그래서 혼자 온 사람들은 유랑같은 곳에서 동행을 구하거나 해서 많이 가는 듯 했는데, 그런 건 그닥 내키지 않았다. 어쩌다 1인분만 파는 집을 검색으로 찾아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찾아갔다.


샐러드까지 해서 가격도 13유로로 매우 쌌는데 역시 싼게 비지떡이었다. 각종 블로그에서 본 티본스테이크와는 두께부터가 달랐다. 다들 인생 스테이크라고 그렇게 엄지를 치켜세우던데 내가 먹은 건 그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고기인데 썩어도 준치라고 기본적으로 어느정도 맛은 있었다. 와인을 한잔 시키고 후식으로 에스프레소도 한잔 시켰는데 그 둘은 매우 맛있었다.

그것만 먹고 다시 숙소에 돌아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녁까지 잤다. 그리고 다시 야경을 보러 언덕에 갔다가 왔다. 피렌체에서의 이틀동안 한게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켈란젤로 언덕에서의 야경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기억으로 남은 도시였다.

여행 초기에는 이런저런 생각도 많이 하고 자주 글도 쓰고 그랬던 것 같은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둘다 줄어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 생각은 많이 하는데 항상 비슷한 주제에 대해서만 생각하다 보니 별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아 그럴수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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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66.84€ (방값 59€ 포함)
7/4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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