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요약하는 데는 채 한 문단도 필요하지 않다. 아니, 어쩌면 한 문장으로도 되겠다. 그저 노인이 바다로 나가 거대한 물고기를 낚는 이야기이다.

먼저, 나도 글 쓰는 것을 비교적 즐기고 잘 쓰고 싶어하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정말로 요약하자면 별 것 아닌 이야기지만, 그 과정을 너무도 몰입감있게 잘 묘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기를 주로 썼고 지금도 연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도 이 소설을 읽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요즘 서점에 나온 여행기를 보면 감성이 흘러넘치는 분위기인 글이 정말 많다. 개인적으로는, 사람마다 가진 감성은 제각기 너무 달라서 누군가가 여행지에서 느낀 감상 그 자체를 옮겨적은 글로는 글쓴이가 느꼈던 감상의 크기가 타인에게 그대로 전해지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바닷가에서 하늘을 붉히며 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누군가는 그저 멋있다고만 생각할 수 있고 또 누군가는 옛 연인과 여행지에서 봤던 노을을 떠올리며 그리움과 추억에 젖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떠올렸던 생각이나 감정들을 묘사하는 것보다, 내가 있었던 장소와 상황, 그 시공간의 느낌을 자세히 묘사하는 식으로 글을 쓰는 것을 지향한다. 그것이 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상상의 기회를 제공하고 자신만의 감성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방식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처럼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한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인간으로서도 느끼는 바가 많았다. 처음에 요약했듯, 이 소설은 노인이 바다에서 물고기를 낚는 이야기이다. 이 요약에는 그저 행동 주체와 행동의 결과만 있을 뿐이다. 물고기를 낚으러 가서 어떻게 됐는지는 혹시나 스포가 될까봐 언급하지 않겠지만, 노인은 물고기를 낚으며 수많은 고뇌와 고통을 겪었다. 그 과정이 바로 백수십 페이지에 적혀있는 긴긴 이야기이다. 우리는 결과의 시대에 살고 있다. 누가 뭐를 했다, 뭐를 이뤘다, 이러한 결과들만이 인정받고 회자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결과, 물론 중요하다. 대입이든 취업이든 이직이든 인생을 살며 뭔가 하나라도 이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서로를 평가하고 평가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바쁜 일상에서 누군가를 평가하기 위해 그 사람이 겪었던 모든 과정과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결과가 대충 과정에 비례한다는 가정 하에 그렇게 결과를 가지고 서로 평가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 속에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풍토가 생겨난 것은 한 켠으로는 씁쓸하기도 한다. 노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우리가 과정이라고 부르는 것 또한 하나의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살 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고, 남은 삶에 미련이 없는 노인이기에 우리가 결과라고 부르는 것이 인생에서 크게 의미가 없어서 그럴수도 있겠다. 난 아직 젊지만, 그래도 그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결과가 미약하다고 거쳐간 과정을 의미없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 그 과정 자체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인생 말이다.


노인과 바다 미니북 (한글판)
국내도서
저자 :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 베스트트랜스역
출판 : 더클래식 2017.05.01
상세보기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균의 종말 (토드 로즈)  (0) 2019.03.04
여행자 (후칭팡)  (0) 2018.05.16
실패한 여행기 (최윤석)  (0) 2018.01.31
화내지 않고 핀란드까지 (박정석)  (0) 2018.01.31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0) 2017.03.12

#1.

요즘은 고양이와 강아지에 한창 빠져있다. 인스타고 유튜브고, 내 구독 목록과 피드에는 거의 절반이 동물들로 가득 차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정말 애착이 가는 유튜브 채널이 하나 있다. 영상 개수가 많은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이 올린 영상을 전부 정주행했을 정도로 말이다.

하고많은 동물 채널들 중에서도 이 채널을 유독 좋아하는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동물과 사람의 이상적인 거리를 이 채널이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채널의 주인은 시골에서 양어장을 하는데, 집 주변 야산과 들에 살던 배고픈 야생고양이들이 물고기에게 줄 사료 봉지를 다 뜯어놓고 난리를 쳐 놓길래 차라리 밥을 주기 시작했다고 한다. 집 주변 연못이나 저수지에서 생태교란종인 배스를 잡아 삶고 굽고 회를 떠서 밥을 챙겨주고, 그러다 보니 고양이들도 많이 따르게 되었다.

하지만 채널 주인은 그렇다고 해서 고양이에게 큰 정을 주거나 없어진 고양이를 찾으러 나간다든가 하지 않는다. 언제 다시 야생으로 돌아갈 지 모르는 야생고양이의 습성을 알기 때문에, 양어장 주변을 배회하는 고양이들의 밥은 챙겨주지만 떠나거나 죽더라도 덤덤하게 그들을 보내준다. 오는 고양이 잡지 않고 가는 고양이 막지 않는, 딱 그 정도 거리를 유지한다. 고양이를 자신의 삶의 일부로서 들여놓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관찰자로 남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볼 수 있는 볼거리도 있다. 매일 오던 고양이가 며칠동안 자취를 감추다가 갑자기 임신을 해 가지고 오기도 하고, 영상 올리던 초창기에 나오던 고양이의 새끼가 자라서 어미가 되기도 한다. 단순히 한 개체의 성장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도시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고양이라는 종의 생태계'를 간접 체험하는 느낌이랄까. 들개인지 무언지 모를 짐승에게 배를 물려서 고양이가 죽기도 하고, 조금 자란 새끼들을 더 넓은 곳으로 옮기고, 뱀과 쥐를 맨발로 때려잡는 모습을 보면서, 도시에서는 그냥 귀여운 동물이라는 이미지로 소비될 뿐인 고양이라는 종의 본능과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2.

그렇게 영상을 하나하나 보던 중 들어간 댓글창에서 갑자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딜 가든 댓글이 문제다)

배스를 잡아 요리해줄 때 왜 가시를 발라주지 않냐고 댓글을 달던 많은 사람들은, 고양이가 쥐를 잡아 생으로 머리를 뜯어 먹는 영상을 올리고 난 후엔 모두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중성화에 대한 댓글은 고양이 새끼나 임신한 고양이가 나오는 영상마다 계속 올라오는 듯 했다. 중성화를 시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중성화의 중요성과 장점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면서, 그렇게 매일 밥을 챙겨주면서 중성화를 안 시키는 것은 정말 무책임한 태도라고 채널 주인을 비판(혹은 비난)하고 있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중성화를 해야 하는 이유로는

"사람이 일정한 시간마다 밥을 주면서 중성화를 시키지 않으면 개체수가 조절이 안 돼 주변에 피해를 준다"

"고양이의 특성 상 교미하는 과정과 잦은 임신 주기는 암컷 고양이에게 엄청난 스트레스가 된다"

"중성화를 시키지 않으면 성병 등 각종 질병에 노출이 될 수 있으며 이는 수명 감소로 이어진다"

따위의 것들이었다.

댓글을 읽어볼수록 기분이 좀 더러워졌다.


#3.

저런 댓글을 단 사람들은 고양이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적었겠지만, 나는 그 이면에 보이는 철저한 인간중심적 사고에 역겨움을 느꼈다. 개체수가 늘어나 인간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에서 중성화를 시키자고 하는 의견은 말 할 가치도 없으니 일단 접어두자. 암컷 고양이가 원하지도 않는 교미를 하는 과정에서 아픔을 느낀다고, 질병을 얻어서 수명이 짧아진다고 그들의 성기를 강제로 떼어버리자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잔인한 존재인지 처절하게 느꼈다.

중성화가 무조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도시의 골목에 사는 고양이들에게 중성화는 필요악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이지, 고양이를 위한 것은 아니다. 결국 동네에 고양이가 너무 많은 것도 싫고 아예 없는 것도 싫고, 있는 고양이를 전부 다 데려가서 좋은 환경에서 키울 공간도 비용도 사람도 없으니 중성화라는 방법을 통해 인간이 멋대로 적절 개체수를 유지하겠다는 말이지 않은가.

그들의 성기를 떼어내야 고양이들이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말은 사실 개체수 조절을 위해 중성화를 하자는 것 보다도 더 인간중심적인 말이라 생각했다. 인간 사회에서도 존엄사에 대한 찬반이 나오는 마당에 '수명이 긴 고양이 == 행복한 고양이' 라는 등식을 왜 마음대로 만드는가. 임신은 당연히 어미에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임신하지 못하는 몸이 되는게 왜 고양이들을 위한 것이라 단정짓는가. 수컷의 성기에 날카로운 돌기가 있어서 교미할 때 암컷이 고통을 느낀다는 게 왜 그들의 성기를 잘라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인가. 왜 인간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고양이에게 대입하고 쓸 데 없는 감정이입을 하는 것인가. 고양이를 비롯한 동물을 그저 자신의 삶에 속한 하나의 객체라고 느끼는 사람들의 잔인한 발상이지 싶었다. 대체 고양이에게 있어 행복의 기준이 무엇인지 인간이 뭘 알겠는가?

중성화라는 것이 인간의 편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자행되는 '미안한 일'이라고만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어도 이렇게 답답하진 않겠지만, 그걸 고양이의 행복을 위해 인간이 베푸는 은혜인 양 생각하는 태도는 정말로 역겨웠다. 귀여운 고양이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안쓰러우니 인간의 힘과 기술로 고양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야겠다, 어쩌면 구원자 컴플렉스 비슷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4.

그냥 지나가는 말이지만, 저런 논거를 들면서 '수의사들 중 99%가 중성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라는 말은 대체 왜 하는지 모르겠다. 태어나자마자 불필요하게 포경수술을 당해 (돈을 내고) 표피가 잘린 남자들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가진 양심이 어떤가는 상관없이 어쨌든 중성화 수술은 수의사들에게 중요한 돈벌이의 경로 중 하나일 것이다.


#5.

어쨌든 그렇게 생각을 진행시켜 나가다 보니, 집에서 동물을 기르는 것도 두려워지게 되었다. 언젠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넓은 집도 갖고 가족도 생기고 나면, 고양이를 길러보는 건 어떨까 종종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한 생명을 기른다는 것이 정말로 두렵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고양이를 기른다면 그저 행복할 것이다. 밥 주는대로 받아먹고, 애교도 부리고, 같이 놀고 잠도 같이 자면 얼마나 가족같고 좋겠는가.

하지만 이제 내가 만약 고양이를 키운다면, 말 못하는 그 고양이의 눈동자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을 것 같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지 불안할 것 같고, 과연 이 생명체도 나와 같이 지내는 것이 행복할까 궁금할 것 같다. 분명한 건 그 유튜브 채널의 영상 속 자유롭게 뛰어노는 야생고양이들을 보고 나니, 내가 키울 고양이가 행복할 것이라고 단정짓진 못할 것 같다.

배부르고 등 따신거 싫어할 동물은 없다. 하지만 평생을 누군가가 정해 준 좁은 공간에만 살면서 배부르고 등 따시기만 하면 좋을까? 인간 세상에선 그런 곳을 감옥이라고 부른다. 어쨌든 집에서 집사가 따준 통조림을 받아먹으면서 평생 변하지 않는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 고양이가 행복할 지,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고 먹을 것도 부족하지만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자연의 섭리를 따르며 사는 고양이가 행복할 지 인간인 나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6.

인간이라면, 아니 이 세상에 사는 그 어떤 동물이라도 이기적인 행동과 자기중심적 사고는 고유한 본능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본능을 뛰어넘을 수 있는, 다른 동물보다 고등한 사고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그 고등한 사고력을 더 많이 사용했으면 싶다. 다른 존재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안다는 것은 참으로 고귀한 능력이다.

비단 동물과 사람의 관계에서뿐만이 아니다. 사람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얼마나 많은 부모가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하며, 얼마나 많은 꼰대가 자신의 과거에 머물러 타인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지 않는가. 자신을 둘러싼 인간과 동물들을 모두 각자 자유의지가 존재하는 생명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대한다면, 조금 더 자애로운 상위 포식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태적 포식자든, 사회적 포식자든 말이다.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생충'을 보고 든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  (0) 2019.07.11
대학원 첫 학기 결산  (0) 2018.12.25
근황  (0) 2018.07.22
대학원 면접 후기  (0) 2018.05.29
강약약강  (0) 2018.05.1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