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기생충'을 봤다. 참 잘 만든 영화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보이며 비교적 복잡하지 않은 스토리임에도 흡입력이 있었다.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가는 어두운 밤거리에서 길고양이를 만났다. 분명히 그 고양이의 삶은 녹록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된 먹이를 구하기도 힘들 것이며 이유 없는 괜한 발길질 혹은 거대한 자동차에 하루에도 수십 번 위협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우연하게도 영화를 보기 몇 주 전에는 어떤 고양이카페에 갔었다. 그 곳은 고양이들이 뛰놀 수 있는 넓은 야외부지를 낀 곳이었는데, 고양이들은 각자 햇살을 쬐며 노곤하게 쉬기도 하고 뛰어놀기도 하고 사람들 곁에 앉아 손길을 느끼기도 했다.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는데, 직원이 종을 딸랑딸랑 울리며 걸어오자 수십 마리의 고양이들이 뒤따라왔다. 알고 보니 식사 시간이었는데, 고양이 수에 맞춰 접시를 늘어놓고 음식을 담아주자 익숙한 듯이 각자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본 송강호네 가족과 이선균네 가족의 사회적 계급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도 상당했지만 두 환경의 고양이들의 모습에 비할 바는 못 되는 듯 했다. 그 고양이카페에서 사는 고양이들이 어떤 경로로 그 곳에 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만 고양이카페의 직원과 연이 닿았다는 점 말고는 두 환경의 고양이가 그렇게 다른 삶을 살게 될 이유가 없어 보였다. 고양이카페에 있는 고양이는 단지 고양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예쁨을 받으며 꼬박꼬박 시간 맞춰 영양가 있고 따뜻한 밥을 먹고 있었다. 길고양이는 길고양이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길에서 거친 삶을 살아야 하고 말이다. 두 곳의 고양이가 어느 날 위치를 바꾸어도 직원들 말고는 전혀 알아 볼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들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각 고양이들의 삶의 모습은 아마 거의 영원히 바뀔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고양이들 사이의 계급과 인간 사회의 계급에 차이가 있다면, 인간들의 계급은 자신들이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영화 막판에 나오는 송강호 아들의 상상 씬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한다. 만약 그런 일이 상상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불가능한 일이었다면 그런 장면은 애초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 정도로 계급이 뒤바뀌는 것이 매우 힘들지언정 말이다.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은 내가 겪지 못한 다양한 환경에 대해 더욱 쉽게 알 수 있게 됨과 동시에 자신이 현재 속한 환경을 바꿀 수 있는 방법과 선택지를 점점 더 많이 가지게 되었다. 문명 이전 원시인들이 살던 시대에는 과연 계급이라는 것이 없었을까? 개체들이 모여있는 작은 사회 안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크게 보면 그것도 아니다. 비옥한 땅과 강이 흐르는 땅에 태어난 원시인들은 비교적 풍족한 삶을 살았을 것이고 거칠고 차가운 땅에 태어난 원시인들은 삶이 고달팠을 것이다. 중세시대 까지만 해도 자기가 속한 계급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조차 거의 하지 못했다. 지금은 컴퓨터나 스마트폰만 있으면 당장 먹을 물과 음식이 없어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에 대해서도 알 수 있고, 이혼 위자료가 작은 나라 한 해 예산정도 되는 대부호의 삶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그렇게 세상에는 자기가 살고 있는 삶 말고도 삶의 모습이 너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싶어하게 되고 그런 선택을 더욱 많이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사회는 변화했다고 생각한다.

여튼, 영화에서 두 계급 간의 갈등과 하층민이 갖는 열등감, 괴리감은 살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야 해소가 되었는데, 그 만큼 송강호에게 부와 명예라는 것이 그토록 질투가 나고 가진 자에 증오를 느낄 만큼 갖고 싶었던 것이었냐 하면 이선균의 입장에선 그 또한 아닐 것 같다. 이선균은 자기가 부자라는 이유로 죽었기 때문이다. 부자로 살다가 젊은 나이에 칼에 찔려 개죽음을 당하는 것이 나을까, 가난하더라도 살아가는 것이 나을까?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칼에 찔려 죽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송강호가 이선균을 죽이게 된 직접적인 계기인 '코를 막는 행위'에는 많은 것이 함축된 장면이라는 건 누구나 알겠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이선균이 코를 막는 행동이나 송강호가 그걸 보고 증오심을 느끼는 것이나 둘 다 타당한 이유가 있다. 이선균이 사는 세계에서는 그런 '냄새'가 매우 비정상적인 존재기 때문에 그 순간 그토록 불쾌감을 표시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반대로 송강호에게는 그 '냄새'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삶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코를 막는 행위로서 곧 자신의 삶 자체를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어쨌든 영화 속 이야기긴 하지만 하물며 특정 계급의 냄새 때문에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지는 만큼, 자기가 속한 계급이 자신에게 무의식 속에 집어넣은 속성들과 우리네 인생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생각 외로 너무나도 다양하다. 그리고 또 어떤 선택지가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지 알 방법이 없다. 부자라 죽고 가난해서 살기도 하고, 가난의 고통을 원동력 삼아 상류층으로 나아갈 수도 있기도 하다. 고양이들은 자신의 앞으로의 삶에 대해 고민할 필요도 없고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고통스러우면서도 재미있는 것이 아닐까? 확실한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이 사는 환경을 구성하는 요소가 많아지고 선택지가 다양해질 수록 그것들 하나하나를 정확히 아는 것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며 자신과 자신의 삶,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더 나은 선택지를 고를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더욱 돋보일 수 있는 세상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써 놓고 보니 뭔 소리를 써놨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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