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게으르고 또 기분파다. 나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서 게으름피우면 누군가에게 피해가 갈 가능성이 있거나 하는 등의 일이 아니라면 꽤 많은 것을 미뤄두고 또 기분 내킬 때 한꺼번에 해치우는 성격이다. 한번 삘 받으면 뭔가 밤새 하기도 한다.

독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난 절대 서점에서 책을 읽지 않는다. 서가에 꽂힌 책을 주욱 훑어보고, 제목이나 표지디자인 (그것도 좁은 옆면) 이 마음에 들면 한 번 뽑아본다. 스윽 넘겨보고 살 지 말 지 결정하는 데 길어봤자 채 30초도 걸리지 않는다. 한 두 문단을 읽어보고, 실린 사진이나 디자인 등을 살펴보면 삘이 온다. 평소에 돈이 없다고 징징대면서도 기분 좋으면 이렇게 충동적으로 책 두세 권을 살 때도 있다.

그렇다고 그런 책을 사와서 바로 읽는 것도 아니다. 내 책장에 꽂힌 그렇게 산 책들 중 몇 권은 산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첫 장조차 펼치지 않은 책들도 있다. 그러다 언제 한 번 눈길이 가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면 지하철에서까지 들고 다니면서 후딱 읽어내는 편이다.

타이완의 작가 후칭팡이 쓴 이 '여행자' 라는 책도 마찬가지다. 책을 뽑아들고 나서 사야겠다고 결정하는 데는 아마 10초 남짓 걸렸을 것이다. 문장이 남달랐다. 과장 없이 어떤 책이든 한 문단만 읽어 봐도 그 책이 담고 있는 사유의 수준과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이 책에 담긴 글의 깊이는 여행에세이 코너에 꽂힌 책에서 흔히 느낄 수 있는 그것과는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어디를 다녀와서 이랬었다 저랬었다 하는 일반적인 여행기가 아니라, 저자가 여행자로서 느낀 생각들과 여행 그 자체에 대한 고찰을 담은 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도 반 년 가까이 책장을 지키고 있다가 이번에 엄마와 스페인 포르투갈 여행을 갈 때 들고 간 책이다. 비행기에서도 읽고, 비 오는 날 숙소 발코니에서 바다를 보며 읽기도 했다. 장거리 버스에서 읽기도 했다. 무게를 덜어낼 수록 이득이라는 여행 가방에, 두께도 얇지 않은 이 책을 가져가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고민도 했지만 결론을 말하자면 들고 가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여운이 남는 구절들이 기억나 몇 번 다시 들춰봤지만, 여행 중에 이 책을 읽는 기분은 더욱 특별했다.


#2.

언젠가 문득 나는 앞으로 꾸준히 여행을 하면서 살아야만 하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여행을 오랫동안 안 해도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정말 진심으로 어떤 면에선 부럽다. 마치 어디가 아파서 평생 약을 먹고 사는 사람이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을 보며 느끼는 감정이랄까. 정확히 말하면 '쉬지 않고도 오랫동안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그럴 수 있는 원천이 대부분 강한 정신력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주변에서 쉽게 휴식과 재충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부러운 것일까? 그저 밤에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만으로, 주변 사람들과 술 한 잔 하는 것 만으로, 잠시 드라이브를 다녀오는 것 만으로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계속 살아갈 힘을 얻는 사람들 말이다. 혹은 그냥 '쉴 필요가 없는' 사람이 부러운 걸수도 있다.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들, 이런 사람이 있긴 할까 싶으면서도.

어쨌든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해나가고 말고는 상관 없이 이런 저런 생각에 압박을 많이 받는 편이다. 미래에 대한 걱정일 수도 있고, 내 자신에 대해 맘에 들지 않는 점이라던가, 아무튼 그런 비슷한 것들 때문에 말이다. 그런 압박들을 평소에는 잘 다스리면서 살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힘에 부칠 때가 되면 한 번씩은 이 땅 자체에서 도피를 해야 풀리는 것이다. 그 도피가 나에게는 여행이다. 먹고 자고 오늘 뭘 할지만 결정하면 되는 가벼운 생활을 하면서, 학생으로서의 나, 아들로서의 나, 사회인으로서의 나를 향한 압박에서 벗어난다. 여행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짊어진 신분은 '여행자'라는 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자'로서 내게 완전히 새로운 곳을 탐험하면서, 나에게 압박을 주었던 내가 떠나온 그 고향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된다. 여행을 마칠 즈음에는 그 고향을 그리워하고 다시 조금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게 내가 여행을 하는 이유 중 하나다. 내가 사는 한국에서는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듣고 아무리 뭔 짓을 하더라도 내가 익숙한 장소에 있다는 것 만으로 내가 짊어진 사회적 신분들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벗어나야만 진정한 휴식을 하고 있다고 느낀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이렇듯 '여행자'라는 신분은 일 년에 고작해야 몇 번 가질 수 있는, 그리고 내 일상과 내 고향이 나에게 부여하는 신분과는 매우 다른 특별한 신분이다. 그런 간헐적 '여행자'로 살아가는 사람이, 그들의 여행지에서 그리고 그들의 고향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이 책에 정말 오롯이 담겨 있다. 위에 "여행을 안 하고 사는 사람들이 어떤 면에선 부럽다" 라고 말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난 여행에 대해 애증을 동시에 느낀다. 그런 애증의 여행자란 신분을 몇 번 짊어지고 여행을 하면서 어딘가 느낀 불편하고도 심오한 감정과 생각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게 바로 이거였구나' 하고 되살아났다.

나는 앞으로도 여행을 계속 할 것이다. 기왕 그럴거라면, 점점 더 현명한 여행자가 되고 싶다. 그리고 현명한 여행자가 되고 싶을 때 마다 나는 이 책을 몇 번이고 다시금 펼칠 것이다. 똑같은 여행일지라도 '놀러 가' 라는 말 대신에 '여행 가' 라고 말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여행자
국내도서
저자 : 후칭팡 / 이점숙역
출판 : 북노마드 2014.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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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처음 밴드부에 들어간 지 10년이 지났다. 고등학교 때도 밴드부였고 지금도 밴드 동아리를 하고 있다. 스쿨 밴드가 카피하는 곡이나 연주 수준은 보통 거기서 거기긴 하다만 어쨌든 정말 오랜 취미 중 하나다.

어제는 합주가 있었다. 집에서 준비를 하고 나와 시간을 대충 계산을 해 보니 약속된 시작 시간보다 20분 정도 늦을 것 같았다. 늦는다고 얘기는 해야 하니 단톡방에 좀 늦을 것 같다고 메세지를 치려는 순간이었다. 내가 13학번이고 팀엔 모두 15학번, 17학번 등 후배들이었는데, 그 순간 부끄럽게도 '늦는다고 해도 애들이 나한테 막 뭐라 하지는 않겠지..? 좀 가볍게 말해도 되려나?'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갔다.

다행히 참 못된 생각이었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내가 제일 후배이고 막내이던 시절, 09 10 11학번 선배들 사이에 껴서 연습하던 그 때를 떠올려 봤다. 그 때도 게으른 나는 가끔씩 늦을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이면 마치 카톡창 너머에 내가 납작 엎드리는 모습이 그려질 정도로 선배들에게 죄송해 어쩔 줄 몰라하곤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해서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며 성급히 악기를 들던 나의 모습이. 그 때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약속에 늦는다는 건 내가 어느 위치에 있건 잘못된 행동이고 상대방이 선배든 후배든 기분이 나쁠 만한 행동이다. 그런데 누구를 상대하느냐에 따라 내가 갖는 죄책감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것, 내 스스로에게 더 또는 덜 엄격해진다는 것, 상대방의 기분을 더 또는 덜 헤아린다는 것.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저께야 그런 생각이 잠깐 들긴 했어도 금방 스스로를 바로잡았지만, 이런 생각을 더욱 당연하게 그리고 더욱 자연스럽게 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얼마나 더 철이 들어야 하는가?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해 윗사람에게 사과할 때와 똑같은 감정과 언어로 아랫사람에게 사과하기 위해서는 내 인격이 얼마나 더 다듬어져야 하는가? (윗사람 아랫사람은 포괄적인 의미로 쓴 단어이고 동생, 후배들을 내 아랫사람이라 생각하는 건 전혀 아니지만)

정말이지 난 아직 모자란 사람이다. 형이 되고 선배가 되고, 훗날 사회에 나가서 누군가의 상사가 되고, 어쩌면 아버지가 되고, 그 무엇이 되더라도, 살아갈수록 점점 더 스스로를 낮추고 경계하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 흔히 '강약약강(강한 사람에게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 강한)' 이라고 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정말 싫어하는 나지만, 그런 나도 '강약약강'이 되지 않기 위해선 무던한 노력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이게 또 은근 보기보다 어려운 일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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