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 때, 막 회사에 입사해서 적응하고 일 배우느라 애쓰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한데 벌써 일 년이 흘러 2021년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다.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느꼈던 해이기에 짧게나마 올해를 정리하고 2022년을 맞이하려 한다.
#1
뭐니뭐니해도 올해 있었던 가장 큰 변화는 처음으로 직장인이 된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이전에도 인턴으로 일을 한 적이 있었고 꽤 오래 다니면서 나름의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했었지만, 정규직 직원이라는 사실이 그때와는 아무래도 다른 느낌을 주는 건 사실이다.
처음 수습기간 3개월 동안에는 사실 보여준 게 거의 없다시피 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완벽한 신입의 모습 그 자체였다. 개발자 규모가 그래도 30명 내외 정도로 스타트업 치고는 큰 개발조직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스타트업인지라 신입을 채용하는 경우가 많이 없는데, 다른 분들에 비해 기여할 수 있는 게 너무 없고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조급해지고 내 스스로에게도 실망했던 겨울을 보냈었다. 작은 핑계를 대자면 입사하는 날 노트북만 덜렁 받고서 다음날부터 바로 재택근무에 던져지게 되었는데, 그래서 모르는 걸 여쭤보기도 더욱 힘들고 적응하는 데도 애를 먹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정규직 전환이 되고, 하나하나 작은 것부터 해 나가기 시작하면서 여름이 지날 때 즈음엔 어엿하게 몇 가지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분기 및 반기별 면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상반기 내내 나도 모르게 위축되어있던 마음을 어느 정도 풀고 나를 조금 더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 팀과 우리 회사, 우리 제품에 뭔가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었고, 또 작더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동료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면담 때 정확히 내가 그런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초반의 힘들었던 시간들이 스쳐지나가면서 응어리졌던 마음이 풀어지고 순간 울컥했던 것 같다. 아마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상징적인 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늦가을 정도까지는 광고 운영을 자동화할 수 있는 솔루션 개발을 맡았다. 예를 들면 광고주의 쇼핑몰에 등록된 수십만 개의 상품 정보를 매일 정해진 시간에 불러와 온라인 광고 운영에 활용되는 정보 파일을 갱신한다든가, 페이스북 혹은 카카오 등의 광고 상품을 서비스하는 회사로부터 광고 성과 데이터를 얻어와 파일로 어딘가에 적재해 주는 작업을 자동으로 돌린다든가 하는. 서비스 사용자에게 직접 닿는 부분을 개발하는 건 아니었지만 같은 회사의 마케터 분들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을 개발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직접 업무에 대한 피드백을 들을 수 있었고 나름의 보람을 느끼면서 재밌게 일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전부터 데이터 엔지니어링이라는 직무를 경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고, 회사 내에서 조직개편을 진행하면서 운이 좋게 그쪽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조직개편과 동시에 스프린트 및 스크럼 기반으로 업무 관리도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체재가 갖춰지기도 하고, 코드 리뷰도 더욱 활발해지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움과 동시에 부족함을 느끼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겨울을 보내고 있다.
참 좋은 분들만 계신 것 같다. 또라이 보존 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회사랄까. (이런 생각이 든다면 본인이 또라이인 거라고 했는데...) 인간적으로도 정말 모난 거 없이 좋은 분들만 계시고, 업무적으로도 배울 것들이 많다. 사람 복은 정말 타고난 게 아닐까, 정말 좋은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으면서 커가고 있다.
#2
3월 말 즈음에 정규직 전환이 되면서 동시에 전문연구요원으로 편입되었다. 전문연구요원도 훈련소에는 가야 하는데, 올해부터 3주로 줄기도 했고 어차피 갈 거 그나마 회사에서 내 역할이 크지 않을 때 얼른 갔다오고 싶어서 최대한 빨리 가고 싶었다. 그래서 6월달에 3주간 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
단언컨대 내 인생에서 가장 긴 3주였다. 사실 훈련소 생활 자체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다들 연구실에서 썩어가며 몸 쓰는 일에는 젬병인 탓에 간부나 분대장들도 우리에게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게다가 분대원 18명 중에 27살인 내가 두 번째로 나이가 적었을 정도로 여타 현역병들과는 나이 분포가 확연히 다르기도 하니 기본적으로 분대장들과는 상호존중 관계가 형성되었다. 심지어 코로나 시국이라 pcr 검사를 두 번 할 때까지 야외훈련은 하지도 않으니 몸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다보니 시간이 너무나도 흐르지가 않아서 미칠 노릇이었다. 분대원들과 친해진 이후에는 좀 나았지만 그래도 외부와 단절되어 어떤 디지털 기기도 문명과의 접촉도 없이 오롯이 3주를 보낸다는 게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다. 마지막 3일 동안은 수료할 때까지 남은 시간을 분 단위로 세고 앉아있었다.
아무튼간에 나 같은 대체복무 요원들이 얼마나 큰 혜택을 받고 있는지와 현역병들에 대한 고마움을 동시에 느꼈던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정말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
#3
돌이켜보면 나는 대학생 시절부터 오롯이 스스로 1인분을 할 수 있는 날을 무던히도 기다려왔던 것 같다. 내 한 몸 건사하며 여러가지 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내 능력으로 벌어 충당할 수 있는 그런 거 말이다.
그리고 나는 그 1인분이라는 것의 의미를 시나브로 확장시켜왔던 것 같단 생각이 든다. 경제적인 의미뿐 아니라 심리적, 정신적인 영역까지 말이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게 스스로 부대끼는 그런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그게 사람들과의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다.
직장인이 됨으로 인해 내가 그토록 바라던 그 1인분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 그래서 너무 기쁘고 넉넉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무언가 속이 비어버린 것 같은, 공허한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토록 갈망해왔던 그 1인분이라는 족쇄에 너무 오랫동안 나를 가둬왔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의 형태'라는 일드를 인상깊게 봤었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조금 상처받을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상처를 줄 수 있는 용기" 라는 대사를 만났을 때 무언가 털썩 내려앉으며 울컥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커리어에서의 성공도 중요하고 너무나도 욕심이 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란 사실을 잊지 않는 새로운 한 해가 되길 소망한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나를 내어주고,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조금 더 가까이 찾아갈 수 있는 그런 용기를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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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주말은 엄마의 생신이어서 하루 본가에 다녀왔다. 거금을 들인 리모델링이 끝난 집은 두 번째 방문임에도 아직 생경하기만 했다.

점심 생일상 앞에 둘러앉아서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직 훈련소 때의 습관이 남아있는지 후다닥 밥을 먹고 TV 앞에 앉았다. TV 속에서는 이젠 추억이 되어버린 티아라가 한 예능에 나와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일이 시작된 것은 한 멤버가 클로즈업된 무렵이었다. 원체 관심이 없는 연예인이면 얼굴 외우기도 힘들어하는 나인지라 가슴에 적힌 이름표를 보고 누군지 구별하고 있었는데, 아빠가 한 마디 하시는 것이었다. "얼굴을 엄청 고쳤나 보네.. 완전히 딴 사람이 됐다 야." 음.. 그랬었나? 유심히 얼굴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언성이 살짝 높아진 여동생의 일갈. "아이 그런 말 좀 하지 마"

"왜? 왜 하지 마?"
"사람 얼굴 그렇게 평가하고 그러지 좀 마"
"아니 성형한 사람보고 성형했다고 말도 못 하냐?"
"성형 좀 할 수도 있지, 그냥 그런 말을 하지를 말라고. 꼰대야 그런 거!"
"꼰대? 나 정도면 양반이다. 밥 먹다가 TV 보면서 아빠가 그런 말도 못 해?"
"하 진짜..."

자세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대화의 흐름이었다. 여동생은 저 말을 마지막으로 내뱉고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뒤따라 동생 방으로 들어가는 아빠와 엄마의 지금 뭐 하는 거냐는 한 마디들. 그 뒤로 잠깐 정적이 흘렀다.

정적을 깬 말은 엄마의 장난 섞인 외마디 한숨이었다. "힝... 오늘 내 생일인데..."

 

#2.

이 주제에 대해 굳이 내 생각은 어떠냐 묻는다면... 나 같아도 애초에 누가 성형을 했건 말건 별 관심도 없고, 알아차렸다고 해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겠지만. 여하튼 동생의 이런 주제에 관한 신념이 참으로 확고한 탓인지 그 순간 갑자기 욱한 것도 그럴 수 있다 생각하고, 아저씨 같은 모습을 많이 버린 아빠도 여전히 옛날의 생각이 굳게 박혀있기에 당신이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발언에 딸의 갑작스러운 태클이 들어온 상황을 그렇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고도 생각한다.

만약 동생이 방에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끝장토론을 벌였다면 어땠을까? 백 분도 모자라 솔직히 몇 시간을 이야기한다 해도 한쪽이 다른 한쪽의 의견에 100% 동의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의 생각이 굳게 옳다고 믿고 있기에... 어떤 것이 정답인지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미 서로가 몇십 년간 살아온 각자의 삶 속에서 자신의 발언은 곧 정답이오 상대방의 발언은 오답이기 때문이다. 동생이 여성으로서 외모 품평을 경험했을 때의 감정을 아빠가 알 수 있을까? 아빠가 자신보다 더한 오륙남들 사이에서 비슷한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 동생과의 공감대 형성을 위해 나도 못 들어본 아이돌의 이름을 알려고 하는 그 마음을 동생이 온전히 알 수 있을까? 상대방의 정답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그 상대의 삶에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경험과 지식과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이기에 참 어려운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가 그러한 싸움에서 이기려고 그 어려운 일을 할 것인가? "내가 말을 말아야지"라는 읊조림과 함께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온 화살표는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것이다.

문제는 똑같은 속도로 뻗어나가는 두 개의 뾰족한 화살표의 끝에 엄마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누가 잘했고 못했고를 떠나서 이 논쟁의 최대 피해자는 엄마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다. 이전에도 이런 언쟁이 없진 않았기에 서로 그냥 "또 저런다 또..." 하고 말았겠지만, 엄마는 일 년에 한 번뿐인 생일상이 참으로 안타깝게 마무리가 되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3.

다행히도 엄마의 기분은 금방 풀렸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현금을 인출해 준비한 봉투 탓이었다. 봉투마저도 엄마의 취향을 반영해 아트박스에서 커다란 리본이 달린 걸 따로 사기까지 했다. 아빠와 동생 두 사람도 상대방의 말은 옳다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봉투는 모두가 정답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이미 이런 작은 언쟁쯤은 이제 별거 아니라는 듯 금세 다시 모여 앉아 봉투 증정식과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 촛불을 끄며 작은 소동은 마무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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