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주말은 엄마의 생신이어서 하루 본가에 다녀왔다. 거금을 들인 리모델링이 끝난 집은 두 번째 방문임에도 아직 생경하기만 했다.

점심 생일상 앞에 둘러앉아서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직 훈련소 때의 습관이 남아있는지 후다닥 밥을 먹고 TV 앞에 앉았다. TV 속에서는 이젠 추억이 되어버린 티아라가 한 예능에 나와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일이 시작된 것은 한 멤버가 클로즈업된 무렵이었다. 원체 관심이 없는 연예인이면 얼굴 외우기도 힘들어하는 나인지라 가슴에 적힌 이름표를 보고 누군지 구별하고 있었는데, 아빠가 한 마디 하시는 것이었다. "얼굴을 엄청 고쳤나 보네.. 완전히 딴 사람이 됐다 야." 음.. 그랬었나? 유심히 얼굴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언성이 살짝 높아진 여동생의 일갈. "아이 그런 말 좀 하지 마"

"왜? 왜 하지 마?"
"사람 얼굴 그렇게 평가하고 그러지 좀 마"
"아니 성형한 사람보고 성형했다고 말도 못 하냐?"
"성형 좀 할 수도 있지, 그냥 그런 말을 하지를 말라고. 꼰대야 그런 거!"
"꼰대? 나 정도면 양반이다. 밥 먹다가 TV 보면서 아빠가 그런 말도 못 해?"
"하 진짜..."

자세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대화의 흐름이었다. 여동생은 저 말을 마지막으로 내뱉고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뒤따라 동생 방으로 들어가는 아빠와 엄마의 지금 뭐 하는 거냐는 한 마디들. 그 뒤로 잠깐 정적이 흘렀다.

정적을 깬 말은 엄마의 장난 섞인 외마디 한숨이었다. "힝... 오늘 내 생일인데..."

 

#2.

이 주제에 대해 굳이 내 생각은 어떠냐 묻는다면... 나 같아도 애초에 누가 성형을 했건 말건 별 관심도 없고, 알아차렸다고 해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겠지만. 여하튼 동생의 이런 주제에 관한 신념이 참으로 확고한 탓인지 그 순간 갑자기 욱한 것도 그럴 수 있다 생각하고, 아저씨 같은 모습을 많이 버린 아빠도 여전히 옛날의 생각이 굳게 박혀있기에 당신이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발언에 딸의 갑작스러운 태클이 들어온 상황을 그렇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고도 생각한다.

만약 동생이 방에 들어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끝장토론을 벌였다면 어땠을까? 백 분도 모자라 솔직히 몇 시간을 이야기한다 해도 한쪽이 다른 한쪽의 의견에 100% 동의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의 생각이 굳게 옳다고 믿고 있기에... 어떤 것이 정답인지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미 서로가 몇십 년간 살아온 각자의 삶 속에서 자신의 발언은 곧 정답이오 상대방의 발언은 오답이기 때문이다. 동생이 여성으로서 외모 품평을 경험했을 때의 감정을 아빠가 알 수 있을까? 아빠가 자신보다 더한 오륙남들 사이에서 비슷한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 동생과의 공감대 형성을 위해 나도 못 들어본 아이돌의 이름을 알려고 하는 그 마음을 동생이 온전히 알 수 있을까? 상대방의 정답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그 상대의 삶에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경험과 지식과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이기에 참 어려운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가 그러한 싸움에서 이기려고 그 어려운 일을 할 것인가? "내가 말을 말아야지"라는 읊조림과 함께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온 화살표는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것이다.

문제는 똑같은 속도로 뻗어나가는 두 개의 뾰족한 화살표의 끝에 엄마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누가 잘했고 못했고를 떠나서 이 논쟁의 최대 피해자는 엄마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다. 이전에도 이런 언쟁이 없진 않았기에 서로 그냥 "또 저런다 또..." 하고 말았겠지만, 엄마는 일 년에 한 번뿐인 생일상이 참으로 안타깝게 마무리가 되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3.

다행히도 엄마의 기분은 금방 풀렸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현금을 인출해 준비한 봉투 탓이었다. 봉투마저도 엄마의 취향을 반영해 아트박스에서 커다란 리본이 달린 걸 따로 사기까지 했다. 아빠와 동생 두 사람도 상대방의 말은 옳다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봉투는 모두가 정답이라고 인정할 것이다. 이미 이런 작은 언쟁쯤은 이제 별거 아니라는 듯 금세 다시 모여 앉아 봉투 증정식과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 촛불을 끄며 작은 소동은 마무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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