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롭게 시작한 취직 준비. 7월에 제주도에서 쉬면서 슬슬 준비하다 8월달에 여기저기 서류 넣고 아무리 늦어도 9월 즈음엔 합격 메일을 받는 것이 나의 원대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반복되는 불합격 통지에 멘탈이 부스러지고 무엇이 문제인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어 이 블로그의 글쓰기 화면에도 두어 번 들락거렸지만, 몇 줄 끄적였던 글은 마치 내 헝클어진 마음마냥 엉망진창이었다. 안 그래도 되는 것 없는 마당에 그 엉성한 단어 뭉텅이들까지 보이고 싶지 않아 조용히 탭을 닫았더랬다.

전문연구요원 복무가 가능하면서 신입 데이터 엔지니어를 뽑는 회사들로부터 남김없이 불합격 통보를 받고 난 후에, 이젠 대체 뭘 어찌해야 할까 싶었다. 조금 덜 좋은 회사를 가거나, 내가 하고 싶은 직무를 포기하거나, 여튼 내가 원하던 무엇들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불현듯 포기를 하더라도 마지막 발악은 해 보고 나서 하자 싶어서 뭔가에 홀린 듯이 전문연구요원 업체 명부를 전부 뒤졌다. 심지어 병무청 홈페이지에 가서 병특업체 후보에만 올라온 회사들까지 전부 찾은 다음, 내 마음에 드는 회사들 몇 곳에 메일을 보냈다. 나 이런 사람이고 신입으로 데이터 엔지니어 일을 하고 싶은데, 혹시 나 뽑아줄 생각 없냐고. 대부분은 경력자만 뽑는 회사였고, 심지어 일부는 아예 데이터 엔지니어 채용 공고도 올라와있지 않은 곳들이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참 무슨 배짱이었는지 싶지만, 운 좋게도 그 모습을 좋게 봐주셨는지 몇 곳에서 이력서를 보내달라고 답장이 왔다.


졸업 전에 친구와 같이 재미삼아 사주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사주풀이를 듣고 나서 뭐 궁금한 거 없냐는 말에 "언제 취업이 될까요?" 라고 웃으며 물어봤다. 6월 아니면 11월이 좋다고 했다. '6월은 시기상 불가능하고 11월은 너무 늦는데...' 생각해서 그냥 한 귀로 흘려보내려 했지만 희한하게도 결국 맞는 말이 되고야 말았다. 백수생활 만 5개월, 석사 졸업장 받고 매일 동네 24시 카페만 들락거리며 취준에만 매진한 끝에 11월의 끝자락에 2개의 회사로부터 같은 날 최종 합격 통보를 받는 마법같은 일이 일어났다. 역시 사주는 과학이다.


석사 때 배우고 연구해야 하는 게 별로 재미가 없어서 데이터 엔지니어가 하고 싶었다. 어찌 보면 내 백그라운드를 버리고 시장에 나온 셈이었다. 그런 주제에 복지 좋고 문화 좋은 회사만 원했다. 가진 것에 비해 바라는 건 너무 많아서 결국엔 잘 안 풀리고 포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되는 상상도 종종 했지만... 결국 이뤄냈다. 그것도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는 속담을 실제로 실행하면서 말이다. 합격 메일을 확인하는 순간을 수없이 상상했지만 실제 현실로 다가오니 상상만큼 기쁜 감정이 폭발하지는 않았다. 그저 안도감 내지 후련함 정도가 느껴졌을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그 불안하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결국 마지막 순간엔 내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아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의 말보다 나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그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을 때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얻더라는 걸 이미 몇 번 경험했기 때문이리라. 나만의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하고 있고, 내가 가지고 싶은 건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확신이 생기고 있다. 내가 옳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지난 5달간의 취준을 통해 다시 한 번 증명하게 된 것 같다. 오늘만큼은 내 스스로에게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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