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둘러보고 다시 파리 북역에 도착했다. 고등학교 선배가 오늘 파리에 도착해서 이 날 저녁을 함께하자고 대충 얘기가 되어 있었는데, 대학 친구를 만난다고 오늘 만나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밤에 바르셀로나로 떠나는 버스가 출발하는 터미널에 조금 일찍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터미널 앞에 케밥집이 있길래 케밥을 하나 시켰다. 음료까지 하나 시키니 8.5유로가 나왔다. 정말이지 파리의 물가는 너무 비싸다. 양이 넉넉하고 맛있긴 했지만 유럽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케밥 따위를 8.5유로나 내고 먹어야 한다는 건 어딘가 좀 억울했다. 그래도 버스를 15시간이나 타야 하는 살인적인 일정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배라도 든든히 채워야 할 것 같았다.

야간버스는 저녁 8시에 파리에서 출발해 다음날 아침 11시에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는 노선이었다.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공원에서 약 두시간 가량 주변 미술관의 와이파이를 훔쳐쓰고 버스에 올라탔다. 앞 자리에 앉은 커플이 있었는데 쉴 새 없이 물고 빨고 큰 소리로 웃고 난리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정말 프랑스인들은 남 신경 안쓰는 마이웨이 인생들 같다.

반 쯤 지났을까, 야심한 밤에 휴게소에 잠깐 들렀다. 목이 너무나 말랐다. 길가 휴게소답게 물은 500ml 한 병에 1유로였고 내 주머니에는 70센트밖에 없었다. 사실 30센트 정도야 사정을 말하고 구걸하면 누구나 흔쾌히 줄 수 있는 돈일텐데도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그러지 못했다. 대신 화장실 세면대에서 수돗물을 배가 터질 정도로 마셨다. 아무렴 어때.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열 다섯시간을 내리 앉아있기도 힘든데 목이 꺾인채로 자고 잔뜩 웅크리고 했더니 정말 온 몸이 뻐근하고 허리가 뽀개질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제일 먼저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여행을 계획할 때 부터 절대 부모님께 손 벌리지 말고 온전히 내 돈으로 다녀오자 다짐했었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미 조금씩 지원을 받기로 약속하고 떠난 상태였는데, 또 손을 벌려야 한다니 부모님께도 죄송하고 내 스스로에게도 많이 실망했던 차였다. 하지만 지금도 종종 배를 주려가며 아낀 돈이었는데, 더 이상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메일함을 열어보니 다음과 같은 메일이 와 있었다.


파리를 떠나기 약 이틀 전부터 카드가 인출도 안 되고 결제도 안 되어서 연락해봤더니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ATM에서 돈을 인출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게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니. 정말 듣기만 했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 한 일이 닥치니 머리가 하얘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여행이 끝날 때 까지는 카드를 쓸 수 없다. 여행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것을 위안거리 삼아야 하나.

엄마에게 이런저런 사정을 말씀드리고 죄송하지만 돈을 조금만 더 부쳐줄 수 있겠냐고 여쭈었다. 한숨을 한번 쉬시더니 '그래야지' 라고 말씀하셨다. 그 한숨의 의미는 뭐였을까? 타지에서 사서 고생하는 아들이 불쌍해서였을까, 빠듯한 집안 사정에 부담이 되어서 그러셨을까? 아직도 조금 궁금하긴 하다.

뻐근한 몸을 이끌고 도보 15분거리 숙소에 짐을 이고 질질질 걸어갔다. 다행히 방에는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었다.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반팔 반바지를 입고 에어컨을 쐬며 몇 시간을 푹 잤다. 일어나서는 출출해서 파스타를 해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마트에 갔다. 가격표를 보고 밀려오는 행복감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안 그래도 유럽 중에서는 스페인이 물가가 싼 나라 중 하나인데, 물가 비싼 파리에서 왔으니 모든 식료품 가격이 채 절반도 되지 않았다. 파스타도 맛있게 되어서 배부르게 먹었다.

조금 쉬다 밖으로 나갔다. 가까이 있는 람블라스 거리에 가 보기로 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제일 유명한 거리 람블라스 거리는 늦은 시간에도 활기가 가득했다. 운치 있는 가로등도 분위기를 더하는 데 한 몫 했다. 1년 반 전 겨울에 첫 유럽여행 여행지가 바로 여기 스페인이었다. 그 때 이 람블라스 거리를 걸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보케리아 시장에서 호갱마냥 초콜릿을 비싸게 사 먹은 생각도 나고. 많은 것이 그대로였다. 음악이든 풍경이든, 오감으로 느끼는 것들은 시간이 꽤 지나도 종종 다시 되살아난다.

시간도 늦고,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탓인지 배가 많이 고팠다. 돈 걱정 안하고 마음껏 먹고 싶었다. 13유로 짜리 뷔페를 찾아서 따뜻한 음식을 마음껏 먹었다. 빠에야에 윙, 돼지고기, 구운 야채, 디저트까지 마음껏 먹으니 돈은 좀 많이 썼어도 기분이 너무 좋았다.

조금 더 걸어서 바르셀로네타 해변으로 갔다.


해변가에는 클럽이 많았다. 오퓸(OPIUM) 같은 나도 이름을 익히 들어본 유명한 클럽도 있었고, 아무튼 수많은 삐까뻔적한 클럽들이 주욱 늘어서 있었다. 머리도 두 달째 자르지 않고 추레한 차림의 동양인인 내가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사실 클럽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그저 파도 소리가 잘 들리는 곳에 앉아 바다와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들, 달 구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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