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가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그 동안 여행하면서 이용했던 그 어떤 교통수단보다도 좋았다. 기차 한 열에 네 자리가 아니라 세 자리였는데, 자리가 정말 널찍하고 푹신해서 기분이 좋게 잠이 들었다.

안 그래도 덥기로 유명한 스페인 남부를 가장 더워지는 7월 말에 왔으니 역에서 나오자마자 엄청 더울거라고 예상했지만 생각만큼 그렇게 뜨겁지는 않았다. 사실 한국에서도 유럽의 여름은 아무리 기온이 높아도 습하지 않기 때문에 체감온도는 그렇게 높지 않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이 무슨 느낌인지 단번에 알았다. 햇빛 아래에서는 햇살이 따갑지만 그늘 안으로만 들어가면 그렇게 덥지 않다. 땀이 나도 습하지 않아서 금방 마르고 불쾌하지 않다. 이런 더위라면 괜찮다.

숙소는 매우 깨끗한데다가 각 침대마다 커튼이 달려있고, 저녁엔 전망 좋은 옥상에서 프리 샹그리아 파티까지 있었다. 게다가 횡단보도만 건너면 바로 앞에 시장이 있었다. 그 동안 엄청나게 많은 게스트하우스를 갔지만 손에 꼽을만큼 좋은 곳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짐을 정리하고 나왔는데 시장이 아직 닫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냉큼 달려갔다. 내가 관심있는 곳은 역시 타파스와 함께 술을 파는 가게들이었다. 남부 해안가에 위치한 도시답게 해산물을 사용한 타파스 메뉴가 가득했다. 공용 테이블은 꽉 차있어서 한 가게에 서서 맥주와 새우 요리 타파스를 시켜 먹었다. 칠리 양념이 된 새우 구이를 마요네즈 비슷한 소스에다가 찍어먹는 타파스였는데 맥주 안주로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조금 쉬다가 지도를 봤더니 동네에 퐁피두 센터가 있는 것을 보았다. 파리에 있던 그것과는 분명 다르겠지만 이름이 똑같아서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주로 현대 미술을 전시하는 곳이었다. 철조망으로 된 훌라후프를 알몸으로 돌리는 여자의 동영상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 외에 그렇게 크게 인상깊은 것은 없었지만, 사람도 많이 없어 쾌적하고 입장료도 저렴해서 한적하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엔 꽤 좋은 곳이었다.


말라게타 해변으로 가는 길에는 야자수가 양쪽에 펼쳐진 공원이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간이라 어디에 있어도 그늘이 많지 않아 살이 타는 느낌을 좀 받았는데 야자수 밑으로 걸어가니 역시 시원했다. 해변 앞에는 모래로 만든 '말라게타' 가 있었다. 끝을 모르고 펼쳐진 지중해가 정말 멋있었다. 들어가보고 싶었는데 짐도 있고 옷차림도 그렇고 많이 망설여졌다. 결국 내일 들어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숙소에 다시 와서 쉬다가 프리 샹그리아를 주는 시간에 올라갔더니 카드 게임을 하던 무리가 나보고 같이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한 게임을 즐겁게 하고 한참 기다려 숙소에서 파는 빠에야를 사 먹었다. 왠지 모르게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일면식도 없는 옥상 테라스의 이 외국인들도 왠지 정겹고, 옥상에서 보이는 석양빛에 물든 도시도 따뜻하고. 이제 정말 이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 걸까? 아무튼 좋은 징조같다. 그리고 지도 앱을 열어 스페인 남부에 GPS 표시가 뜬 걸 보니 내가 그동안 얼마나 정신나간 짓을 했는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사실 말라가에 대한 첫인상은 '정말 깔끔한' 도시라는 것이었다. 해변으로 유명한 도시이기에 그저 '해변만 멋있고 나머지는 그저 그렇겠지' 하는 막연한 편견이 있었는데, 그런 생각은 보기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어딜 가도 깔끔하고 깨끗하고 세련되고 '디자인적'이었다. 왠지 돈 많은 유럽 사람들이 쇼핑과 해수욕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고-급 종합 휴양도시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화가이지 않을까 하는 피카소의 고향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피카소 박물관에 한 번쯤 들러보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역시나 그놈의 입장료가 문제였다. 아~ 비참해라.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적절히 포인트를 살린 도시의 곳곳 요소들이 어우러져 말라가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아무튼 도시 구경을 짤막하게 하고 어제 찾은 말라게타 해변으로 다시 갔다. 오늘은 해수욕을 할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왔다. 그래봤자 잘 때 입는 반바지를 입고 온 것이지만. 역시나 어제와 같이 많은 사람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동양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럴 이유는 하나도 없는데 이게 은근 좀 눈치가 보인다. 여럿이서 온 것도 아니고, 서양인들 사이에 낀 홀로 온 남자 동양인이라니. 윗옷을 벗기도 전에 또 다시 쫄보본능이 발동했다. 하지만 눈을 꽉 감고 상의탈의한 후 바다에 몸을 던졌다. 망설임은 괜한 것이었다. 언제 또 이 드넓은 지중해에 몸을 맡길 수 있을까. 물을 조금 먹긴 했지만 맑은 바다에서 둥둥 떠다니면서 타인의 시선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를 만끽했다. 동양인이면 뭐 어때? 혼자 왔으면 뭐 어때? 좋은 몸이 아니면 뭐 어때? 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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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1 61.3€ (방값 40€)
7/22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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