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에는 박물관 두 군데(오르세, 오랑주리)를 들리기로 했지만 너무 늦은 시간에 눈을 떠서 둘 다 갈 수 있을 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지하철을 타지는 않았다. 전날에 간 서브웨이의 샌드위치가 마음에 들어서 이 날도 서브웨이로 아점을 때웠다. 라파예트가를 한참 따라서 걸어 오르세 미술관에 도착했다. 줄이 조금 긴 듯 해 보였지만 10분 정도 기다리니 금방 줄이 줄어들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에도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기차역을 개조해 만든 박물관이라 그런지 구조도 특이하고 둥근 모양의 천장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정말 기차역에나 걸려있을 법 한 커다란 시계들이 마음에 들었다. 0층, 1층, 2층, 5층을 둘러보고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들이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귀에 꽂은 음악 때문인지 계속 지나다니는 사람들 때문인지 혹은 다른 잡생각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림들을 헤쳐 걸어가는 새 이것저것 그림과는 관계 없는 생각이 많이 든 것은 맞다.


숙소에서 늦게 나온 탓에 오랑주리 미술관까지 갈 수 있을까 싶었지만 적절히 시간이 남은 것 같아 그냥 가 보기로 했다. 오랑주리 미술관 자체는 규모가 작아 다 둘러보는 데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왠지 줄이 오르세 미술관보다 더 길게 늘어선 탓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일단 줄을 섰는데 다행히 안을 모두 둘러볼 시간 정도는 남기고 입장을 했다.


오랑주리의 핵심인 모네의 수련 연작. 둥근 방을 따라 걸린 이 작품은 발상 자체는 정말 대단했지만 좀 많이 어둡고 칙칙한 색감이라 뭔가 익숙하지 않았다. (실제로 보면 위 사진보다 훨씬 어둡다.) 좋긴 했지만 햇살이 비치는 밝은 분위기로 그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수련 연작을 많이 기대를 하고 갔는데, 지하에 있는 르누아르 등의 그림들도 생각보다 훨씬 좋아서 돈이 아깝지 않았다.


오랑주리 미술관까지 보고 나왔더니 하늘엔 구름이 가득 끼어 있었다. 날씨가 마치 내 마음같아 주변 슈퍼에서 또 파스타 샐러드와 작은 와인 한 병을 사서 먹고, 조금 취한 기분으로 돌아가는 관람차를 구경했다.

다음 날엔 고흐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인 근교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를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날에 그 곳으로 가는 열차가 다니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계획이 무산되어버렸다. 어떻게 해야 할 지 한참을 고민하다 루브르 박물관과 노트르담 대성당을 겉만 보고 오기로 했다.


정말로 겉만 보고 지나갔다. 그래도 루브르의 저 유리 피라미드를 보니 내가 지금 파리에 있다는 것을 새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이 날은 정말로 무더워서 음료수든 물이든 뭐라도 사다 먹고 싶었는데 주변에 마트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강을 건너서 한참 밑에 있는 어느 공원으로 가는 길에 마트를 발견해서 또 다시 파스타샐러드와 와인을 샀다. 이 날은 바게트도 하나 샀다. 종이 봉지 위로 길다랗게 나온 바게트를 들고 가니 정말로 무슨 파리지앵이 된 것만 같았다.


이미 질려버린 파스타샐러드를 먹고, 잘 찢기지도 않는 바게트를 잘근잘근 씹어먹고,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서 (한국이라면 공원에서 상상도 못 할!) 사람 구경을 하고 꽃 구경을 했다.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은 매우 시간에 숙소로 돌아갔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에너지가 다 빠져버려서, 보통 여행자같으면 네 시면 한참 구경다닐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침대에 뻗어버렸다. 침대에서 이것저것 생각을 하다가 너무 괴로워서 잔뜩 취하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 또 주말이라 술 파는 곳이 없었고, 유일하게 숙소 맞은편 맥주집에서 맥주만 먹을 수 있었다. 그 날은 정말 미쳤는지 5유로짜리 맥주 500cc를 4번이나 시켜먹었다. 이 짠돌이가 하루어치 맥주에 20유로나 써 버렸다. 원체 술을 잘 못 하는 탓인지, 아무리 맥주라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 것인지, 마음이 괴로워서 그런 것인지 정말 잔뜩 취해서 저녁 7시에 잠이 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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