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바르셀로나에 온 목적은 별 거 없었다. 작년의 유럽여행에서 이미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다녀왔고, 이번 여행에선 스페인 남부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파리에서 스페인 남부까지 한 번에 가기에는 너무 힘들어서 중간중간에 쉬어가기 위해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일정에 넣은 것이다. 그래서 사실 바르셀로나에서 볼 만한 곳은 이미 다 봤고, 여유가 되는 날 천천히 산책삼아 도보로 둘러볼 참이었다.

어찌됐든 지금 카드를 사용 못하게 되었으니 앞으로 돈을 어떻게 쓸 건지 계획을 세워야 했다. 통장에는 약 70만원 정도가 남아있었고, 카드는 지금 정지된 체크카드 이외에 국제학생증에 붙어 있는 체크카드 기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국제학생증 체크카드는 수수료가 너무 비싸서 이걸로 남은 돈을 다 쓸 수는 없었다. 제일 합리적인 방법은 현금을 들고다니는 위험을 감수하고 남은 돈을 모두 인출해서 쓰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한국인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유랑 게시판에 글을 몇 번 남겼다. 현재 바르셀로나이고 이러저러한 상황인데, 내가 폰뱅킹으로 이체를 해 드릴 테니 인출을 좀 해 달라, 사례하겠다 대충 이런 글이었다. 사실 한 명쯤은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나올 줄 알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하긴, 여기까지 와서 남의 돈 뽑아줄 사람이 어디 있겠나. 다들 열심히 이곳저곳 둘러보느라 바쁘겠지.

그렇게 이 일이 해결이 안 되어서 어딜 나갈 엄두도 못 내고 숙소 라운지에 풀이 죽어 앉아있던 찰나에 내 또래쯤 돼 보이는 어떤 한국인 여자분이 내 건너편에 앉았다. 서로는 말이 없이 30분 넘는 시간 동안 같은 공간에 앉아 있었지만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저 분은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 내가 이상한 사람인 줄 알고 부탁을 거절하면 어떡하지? 하긴 60만원 가까이 되는 돈을 인출해달라는 건 뭔가 이상하니까.. 여튼 이런저런 생각에 부탁하는 말을 건네는 것을 주저했다.

그러다 마침내 말을 걸어서, 자초지종을 간단히 설명하고 나를 도와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 분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당연하죠!' 라고 말했다.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 ATM이 바로 옆에 있을 줄 알았는데 없어서 도보로 5분정도 가야 있는 상황이었다. 무더운 날씨에 짜증나는 부탁일 수 있음에도 연신 괜찮다는 말로 나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돈도 무사히 뽑아주셨고. 정말 정말 감사했다. 사실 베니스에서도 숙소에서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 때 나도 흔쾌히 도움을 드리겠다고 하고 대신 돈을 인출해 드렸는데, 그 때 착한 일을 한게 돌아온 건 아닌가 싶었다.

아무튼 작년에 구엘 공원을 갔을 때 그 곳에서 본 길거리 연주가 매우 인상 깊게 남아있었다. 카혼을 치던 아저씨는 중간에 일어나서 리듬에 맞춰 탭 댄스를 췄었는데, 그것이 또 음악과도 잘 어울려서 씨디를 살지 말지 고민까지 하게 만들었었다. 1년 반이 지난 지금도 그 분들이 그 자리에 있을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 때 추억이 떠올라서 구엘공원에 다녀오기로 했다.

가는 길에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있어 그 쪽으로 지나가기로 했다. 안까지 들어가보지 않더라도 그 웅장한 높이에서 오는 위압감은 쉽사리 느끼기 어려운 것이기는 하다.


요 앞 담배가게에서 담배를 샀다. 한 대 피우는 동안 요 외관을 구경하다가 다시 구엘 공원으로 출발했다.

구엘 공원은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고 입장료가 필요 없는 곳이 있다. 작년에 왔을 때도 공원 안에 있는 것들에 비해 입장료가 비싸다고 생각해서 유료인 곳은 들어가보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당연히 무료인 곳만 둘러볼 참이었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많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옆의 샛길로 올라갔던 기억이 났다. 관광객들이 하나도 다니지 않던 그 길도 그대로 거기 있었다.

공원에서 더 더 올라가다 보면 뭔가 꼬불꼬불한 숲길 사이에 그 연주자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면서 계속 올라갔지만 내가 찾던 그 길은 나오지 않았다. 안의 길이 의외로 복잡하고 갈 수 있는 곳도 많아서 자꾸 길을 헷갈려 다른 곳으로 간 듯 하다. 그렇게 헤매다가 언덕의 꼭대기까지 올라간 것 같았다. 바르셀로나의 전경이 보였다. 날씨가 잔뜩 흐리고 가랑비까지 추적추적 오기 시작한 날씨라 그렇게 반짝이지는 않았지만 빨간 지붕들이 빽빽히 들어찬 모습을 보니 무언가 마음이 편해졌다. 잠시 앉아서 쉬다가 내려갔다.


다 내려가서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 도착했다. 곡선형의 기둥들이 많은 곳. 다시 보아도 이국적인 풍경이기는 하다. 무언가 아프리카 같은 느낌도 들고.


돌아오는 길에 파스타 소스를 사서 남은 면에다가 다시 파스타나 해 먹었다. 어쩔 수 없는 파스타 인생.

저녁을 먹고 조금 쉬다가 숙소 바로 옆에 있는 바에 갔다. 샹그리아 한 잔을 시켰는데 탄산이 너무 많고 맛이 달았다. 다른 술이 있을까 해서 물어봤더니 모히또가 있다고 한다. 모히또는 꽤 맛있었다. 바에서 기르는 검은 개가 밥을 먹는 모습과 어둑어둑하고 구름 낀 하늘,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들에서 어딘가 정다운 익숙함을 느꼈다. 원체 어디 식당이든 어디든 비싸다고 가질 않으니 이런 사람 냄새나는 풍경들을 통 보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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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9 90.5€ (방값 41.44€, 유심 20€)
7/2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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