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밤 블루스클럽에서 실컷 술을 마시고 잔 탓인지, 새벽에 자동으로 눈이 떠지던 것이 오늘은 도통 일어나지지가 않았다. 버스는 아침 8시 15분에 출발하는데, 눈을 뜬 시각은 6시 50분. 그런데 지도를 보니 버스터미널이 생각보다 멀리 있었다. 걸어서 갈 예정이었는데 도보로 35분 정도 걸리는 것 같았다. 허겁지겁 옷만 갈아입고 숙소를 나와야 했다.

버스를 타고 드디어 러시아를 탈출했다. 옆자리에 탄 드미트리는 알고 보니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갔다 온 사람이었다. 한국어도 조금 할 줄 알고 찜닭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재밌게 올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육로를 통해 유럽으로 들어오는 한국인이 적기 때문에 국경심사를 빡세게 한다는 얘기를 들어서 잔뜩 겁을 먹고 있었는데, 그렇진 않고 그냥 별 물어보는 것도 없이 쉽게 도장을 찍어주었다. 이제 각종 표지판에 키릴문자가 아니라 알파벳이 적힌 걸 보니 숨이 한층 트이는 것 같았다.

사실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모두 발트해 연안에 있기 때문에 발트3국이라고 묶이긴 하지만 에스토니아는 다른 두 나라와는 좀 다르다. 오히려 바로 바다건너 있는 핀란드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언어도 이 두 나라와는 어족 자체가 다르며 (핀란드와 같은 어족이다), 도시의 분위기도 사뭇 다르다.

북유럽의 디자인 철학이나 센스가 도시 곳곳에서 느껴졌다. 저 깜찍한 주차장의 차단기 하며, 성당 앞에 늘어진 깔끔하기 그지없는 가로등까지. 러시아와는 딴판인 풍경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버스 좀 타고 와서 국경 하나 넘었을 뿐인데, 많이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버스 터미널과 구시가는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었다. 한참을 걸어 구시가에 들어오니 넓은 중앙 광장이 보였다. 뾰족뾰족한 건물들이 마치 노르웨이의 베르겐을 연상시켰다.​​

구시가의 거리들 역시 아주 깔끔한 맛이 있었다. 탈린에는 저렇게 성벽이나 요새 모양으로 생긴 건물이 꽤 있었는데, 건물들과 잘 어우러져서 고상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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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사람들이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Stop the war, Putin is Evil' 이라고 외치더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를 무력 병합한 것 하며, 요새 NATO와도 갈등이 있어 에스토니아 주변에 전투기가 뜨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듣기는 했다. 사람들의 반응이 참 재밌었다. 어떤 사람은 박수를 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구호에 맞춰 시위대에게 손가락질하면서 'You are Evil! You are Evil!' 이라고 외쳐댔다.

사실 구시가를 돌아다니면서 의문이 드는 점이 있었다. 에스토니아는 1940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지배 하에 있었는데, 구시가 곳곳에 러시아말이 적혀있는 것이었다. 한국 사람인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일본 점령이 끝난 이후에 번화가에서 일본어로 적힌 간판 따위를 보는 꼴 아닌가?

더 신기한 것은 젊은 호스텔 주인도 러시아말을 쓰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궁금증에 대해 물어봤는데, 답이 좀 놀라웠다. 에스토니아에서 러시아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40%에 가까우며 순혈 에스토니아인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호스텔 주인의 부모님도 쭉 에스토니아에서 산 러시아인이며 주인도 에스토니아에서 태어난 에스토니아 사람이라고 했다.

한국도 일본에 지배당한 경험이 있는데, 우리는 일본어의 잔재가 남아있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며 그런 입장에서 여기서 러시아말을 본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얘기하니 아 그러냐며 신기해하더라. 이 주인이 러시아 계통 사람이라 그런지 아니면 실제로 소련 연방국가였던 시절이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던 것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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