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모스크바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관광은 붉은 광장에서 시작하고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붉은 광장 초입에는 장난감 성 같이 생긴 국립 역사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모스크바 시내 곳곳에서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붉은 광장의 한쪽 성벽에도 공사로 인해 망이 쳐져 있었다. 그때문에 뷰가 조금 덜 이뻤다.


그리고 광장 반대쪽에는 저 멀리 성 바실리 성당이 보였다. 일명 테트리스 성. 역시 사진에서 보던 그대로 다른 나라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독특한 디자인이 살아있었다. 하도 신기하게 생겨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국립 역사 박물관 건물도 웬만한 유럽의 건물에 비해 많이 특이하게 생긴 편이지만, 이 성 바실리 성당은 사용된 색깔부터가 개성 그 자체였다.


사실 어느 다른 곳보다도 붉은 광장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바로 이 레닌의 묘였다. 이곳에는 레닌의 시신이 방부처리되어 곱게 정장을 입은 채 유리관 속에 조명을 받으며 누워 있다. 세상에, 저게 진짜 시신이라니. 진짜인 걸 알고 봐도 저게 정말 진짜 시신인가?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만든다. 장례식에도 많이 갔었고 실제로 시체를 염하는 과정도 지켜본 적이 있지만, 몇십 년을 방부제에 절여져 누워있는 시체는 할 말을 잃게 만든다.

모든 위인은 무언가 후세에 남겨 자신의 이름을 잊혀지지 않게 만든다. 음악가는 음악을, 작가는 작품을, 화가는 그림을 남긴다. 레닌은 사상가로서 사상을 남겼다. 그것도 매우 제대로 말이다.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뤄낸 사람이지 않은가. 굳이 그의 시신같은 것이 모스크바 정 중앙에 모두가 볼 수 있게 놓여져 있지 않아도 레닌의 생각, 사상은 러시아 곳곳에 퍼져 있다. (비록 지금은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물이 한참 빠진 걸 여행객인 나도 느낄 정도지만.)

그리고 레닌을 따르던 사람들은 그의 사상으로 점철된 살아 움직이는 국가를 만드는 데에서 나아가, 혼이 빠져나간 그의 육체조차 영원불멸하도록 만들고 싶어했나보다. 그의 정신이 온 나라에 살아 숨쉬고, 그의 육체조차 썩지 않은 채로 모스크바의 중심에 놓여 있다면, 레닌은 살아있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빤히 그의 시신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하자 뭔가 소름이 끼쳤다.


그런 생각을 뒤로 한 채 광장의 한쪽 벽을 메운 굼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원래 이 곳은 소련 정부가 고위층을 위해 직접 만들고 관리하던 곳이라 지금까지도 매우 깔끔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이 곳의 3층에 있는 뷔페식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해결했는데, 싼 값에 괜찮게 한 끼를 먹었다.

오후엔 시간이 남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들렀다. 학생 할인이 없어서 400루블을 그대로 냈다. 바실리 페로프라는 화가를 처음 알게 됐는데, 그의 그림이 가득한 17번 방에서 얼마나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숙소에 돌아와서도 그에 대해서 한참을 찾아보았다.


미술관에서 나와서 조금 걸으니 기타를 연주하는 아저씨가 있었다. 이어폰을 빼고 아날로그 기타 소리를 한참을 듣고 있었다. 여행을 하다가 지칠 때 이렇게 거리 음악을 만나면 앉아 쉬면서 듣는 게 참 좋다.

그날 저녁에 호스텔에서 두 친구를 만났다. 브라질에서 온 안나와 홍콩에서 온 첸이었는데, 둘 다 크렘린은 아직 가 보지 않았다고 해서 다음날에 같이 가기로 했다. 나는 붉은 광장을 다녀왔지만 두 친구는 거기도 가 보지 못했다고 해서 붉은 광장을 먼저 둘러본 뒤 크렘린에 갔다.

크렘린에서는 무기고 입장권과 정원/성당 입장권을 따로 팔고 있었는데 각각 700루블, 500루블로 꽤 비싼 편이었다. 결국 정원/성당에만 가기로 했는데 솔직히 티켓 값어치는 못하는 것 같았다. 별로 볼 거 없고 중국 관광객으로만 가득하다. 하도 그닥이라 사진도 찍은 게 없다. 차라리 무기고를 갈 걸 그랬다.

모스크바를 떠나면서 조금 더 열심히 둘러볼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엠게우를 못 가본것도 그렇고 야경을 보지 못한 것도 그렇고 보지 못한 것이 꽤 된다. 어쨌든 위험한 일은 한 번도 겪은 적이 없다. 사람 사는데가 뭐 어디 다르겠는가. 대신 공기는 더럽게 더러워서 낮에 돌아다닐 때도 숙소에 돌아가서 샤워하고 싶다는 생각만 미친듯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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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5 2648rub (방값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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