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가 윗동네가 있다길래 한번 올라가 봤다. 교회가 하나 있었지만 한쪽 벽이 공사중이길래 영 별로였고, 나머지 건물들도 그닥 구미가 땡기는 예쁜 것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덕 한쪽 끝에 도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탈린 전경이 예술이었다. 저 멀리 파란 바다와 더불어 구시가의 빨간 지붕들이 정말 잘 어울렸다.

아무튼 그런 것들을 빼고는 구시가에 볼 거리는 많지 않았다. 그냥저냥 비슷한 건물들의 연속. 하지만 그렇다고 구시가를 벗어나면 볼 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다. 혹은 내가 잘 알아보지 않은 것일수도 있지만. 어쨌든 구시가를 둘러볼 만큼 둘러봤다고 생각해서 구시가에서 조금 걸어나가면 있는 소련 감옥에 갔다.

그런데 찾기가 너무 힘들었다. 지도를 보면서 따라갔는데 분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없길래 한참을 둘러보다가 조금 더 길을 걸으니까 저 정문이 나오더라. 저것도 Patarei가 소련 감옥을 뜻하는 걸 알고 있으니까 찾았지, 만약에 저 표지판이 없거나 Patarei가 뭔지 몰랐으면 그냥 무슨 공사장인 줄 알고 지나쳤을 것 같다.

문 안은 더욱 가관이었다. 그냥 정말 말 그대로 폐허, 버려진 건물 그대로였다. 대체 여기가 박물관이 맞나 싶을 정도. (나중에 알았지만 여긴 박물관이 아니었다.) 뭔가 사람들도 조금씩 지나가고 안에는 카페도 있다는 광고판도 있길래 확신을 갖고 안으로 들어서긴 했지만, 도저히 어떤 관광지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CCCR] 이라고 적힌 소련 물품을 파는 기념품 가게가 있었다. 흥미로워서 들어가 보니 정말 골동품중의 상 골동품같은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흔치는 않은 가게 같아서 좀 둘러보다가 저런 깜찍한 성냥들을 발견했다. 좋은 의미로는 아닌 것 같지만 여기도 참 푸틴을 끔찍이도 생각해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푸틴 달력까지 팔던데. 아무튼 나는 한국 사람이기에 김정은과 푸틴 얼굴이 합성된 얼굴이 있는 성냥을 하나 샀다. 사실 이게 엽서 빼고 여행 중 처음으로 산 기념품이다.

건물 안은 뭔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밖의 폐허같은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예전 상태를 어떻게 보존해 놓은 그런게 아니라, 그냥 정말 폐건물을 방치해놓다시피 한 곳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미친듯한 한기와 지하실의 꿉꿉한 냄새가 훅 들이닥쳤다. 사실 나는 변태같게도 두가지 다 좋아해서 별 상관은 없었지만, 이런 곳에 2유로라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올 만 한지는 잘 모르겠다.

볼거리가 많지 않은 곳임에도 탈린을 정말 사랑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석양이다. 호스텔 주인이 체크인 때 지도를 펼쳐놓고 친절히 탈린에 대한 브리핑을 해 주면서, 현지인들이 해 지는것을 보러 자주 간다고 나도 꼭 가보라며 소개를 해 준 곳이 있다. 저녁에 할 일이 없길래 올라가서 석양을 보는데 "와..."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는 장관이었다. 구름과 바다와 석양의 완벽한 조화가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다음 날에는 맥주와 육포를 사 들고 다시 이 곳을 찾았다. 첫날 아무것도 없이 갔을 때 맥주가 너무너무 생각났기 때문이다.

깔끔하고 깨끗하고 친절한 도시이지만, 관광하기 썩 좋은 곳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맥주와 석양과 함께 한 저 밤이 너무나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 하나만으로도 언젠가는 다시 찾고 싶은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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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24.6€ (방값 포함)
6/2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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