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캐한 모스크바를 떠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4시간이 채 안 걸리는 고속열차를 타고 갔는데, 한국같았으면 부산까지 가고도 남는 긴 시간이었겠지만 이미 6일 18시간이라는 지옥의 기차 트레이닝을 견뎌낸 나에게 4시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몸에 한기가 돌았다. 바로 가방에서 겉옷을 꺼내 입어야 했다. 고속열차를 타고 북쪽으로 4시간을 달렸으니, 제주도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온 정도려나? 위도상으로 좀 올라오니 날씨의 변화가 확 체감이 되었다. 모스크바보다 평균 기온이 약 10도 정도는 떨어지고 햇볕도 훨씬 약해진 것을 느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부분 관광지는 넵스키 대로라는 무지막지하게 큰 길가 주변에 있다. 내가 묵을 호스텔도 넵스키 대로 한복판에 있어서, 짐을 풀고 나와 길을 쭉 따라 걸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바다에 접한 도시이고, 도시 중심에도 이렇게 물길이 나 있는 곳이 많다. 사실 상트페테르부르크 자체가 물 위에 돌을 쏟아부어 기반을 만든 계획 도시이다. 거리를 걸으면서 이렇게 물길이 있는 곳을 지나갈 때면 그 분위기와 경치가 마음에 들어 또 가만히 서서 보곤 했다.

그리고 확실히 모스크바보다 유럽 냄새가 강하게 났다. 차도 그렇게 많이 다니지 않아서 공기도 훨씬 깨끗하고, 건물들도 유럽 스타일인 것들이 많았다. 게다가 모스크바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영어 간판도 거의 반 정도는 차지하는 것 같았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점원도 많아서 음식 주문하거나 할 때 얼마나 편하던지.


다음날 제일 먼저 에르미타주 미물관에 들렀다. 300만여점이라는 무지막지하게 많은 소장품을 가지고 있는 이곳은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힐 정도로 수준 높은 미술관이기도 하다.

안에는 미라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유물과 그림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고대 유물에도 별로 흥미가 없었고 , 그림에도 선뜻 관심이 가지 않았다. 본관에 있는 작품들은 거진 다 종교회화였는데, 사실 나는 종교회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믿는 종교도 없거니와 그림이 왠지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고, 별로 관심도 없는 종교적 사건을 그대로 옮긴 것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세의 그 화풍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게다가 그림이 많은 만큼 단체관광객 (특히 시끄러운 중국인) 들도 너무 많아서 도저히 작품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 보이면 작은 부분까지 샅샅이 훑어보기도 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기도 하는 재미가 있는데, 전혀 그렇게 집중해서 감상할 만한 환경이 되지가 않았다. 빠글빠글한 사람들을 피해 다니느라 바빴고, 어쩌다 관심이 가는 그림이 보여도 또 사람에 치여 떠다녀야만 했다.

네이버캐스트의 에르미타주 박물관 글을 참고하면서 계속 돌아다녔는데, 건물 남동쪽에 내가 관심있는 19세기 이후 그림들이 있다고 해서 애타게 뒤져 보았지만 어디에도 그런 그림은 없었다. 한참 기운도 빠지고 실망해서 맥없이 앉아 계속 검색을 해 보다가 다른 블로그의 글을 봤다. 본관 초록색 건물 맞은편에 별관이 생겼고 19세기 이후 그림들이 모두 그쪽으로 옮겨졌다는 것이었다. 만세를 부르면서 달려갔다.


사진 속 건물 맨 왼쪽의 작은 문이 별관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모르면 도저히 못 찾는다.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내부 인테리어나 디자인 등이 본관보다 훨씬 깔끔했다. 그리고 제일 좋았던 건, 사람이 정말 없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나머지 걸을 때마다 신발 고무바닥이 끽끽대는 소리를 신경써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르누아르,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부터 신고전주의, 사실주의 회화 등 취향저격하는 작품들이 가득했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들을 천천히 감상하면서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본관과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같은 미술관이 맞나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다.

전시된 그림의 수는 별관이 본관보다야 훨씬 적지만, 작품 감상 환경도 그렇고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나는 본관보다 별관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혜자롭게도 국제학생증 소지자는 본관, 별관 둘 다 입장료가 무료였다. 크렘린에서는 얄밉게도 러시아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만 학생 할인이 되었는데, 여기는 친절하게도 '학생의 국적은 상관 없음' 이라는 말 까지 적혀있었다.


나와서 뭘 먹을까 하다가 팬케익집을 발견해서 들어갔다. 치킨과 치즈가 들어간 팬케익에 크랜베리 주스 하나를 시켰는데 200루블이 채 안 되었다. 양도 적당하고 가격도 싸서 나중에 한번 더 가서 먹었다. 주소는 넵스키 대로 44번지인데, 가게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좋았던 이유 중 또 하나는, 어딜 가든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특히 피의 구세주 성당 앞 거리와 성당 주변에는 항상 연주를 하는 사람들이 꼭 있었는데, 남은 날에도 시간이 비면 항상 그곳에 가서 음악을 듣고 오곤 했다.

특히 첫번째 사진의 밴드는 연주도 잘 하고 흥을 돋구는 데 재주가 있어서, 한 시간 넘게 서서 처음부터 끝까지 공연을 보고 200루블이라는 거금까지 내고 왔다. 듣다가 신이 나서 헤드뱅잉까지 했는데 팬케익과 주스값 정도는 흔쾌히 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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