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성당들도 많이 찾아다녔지만 성당에도 사실 딱히 관심이 없다. 여느 유럽의 도시와 같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유명한 성당이 많은데, 그닥 관심이 없어서 안에는 거의 들어가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외관만큼은 다른 유럽 국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하고 예쁜 디자인을 자랑하기에 외관만 실컷 구경을 했다.

샴쌍둥이나 기형아 등의 표본이 있다는 인류학 박물관에 정말 가보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남은 이틀동안 모두 문을 닫는다고 해서 가보질 못했다. 월요일은 정기휴일이고 매달 마지막 화요일은 청소하는 날이라 문을 안 연다는데 이렇게 재수가 없을수가. 역시 이런 걸 잘 찾아보고 일정을 짜야한다. 이걸 알았으면 첫날에 에르미타주를 안 가고 인류학 박물관을 먼저 갔을텐데 말이다.

아쉬운 대로 주변에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건물을 빙 둘러보고 페트로파블롭스키 요새가 있는 섬으로 갔다. 근데 이 섬에 있는 공원에서 바라본 상트페테르부르크 전경이 정말 예술이었다.


건너편 스카이라인이 정말 멋있게 보인다.

PECTOPAH = 페스토파(x) 레스토랑(o)

성 반대쪽으로 나와 길을 건너니 자연스럽게 여름정원이 나온다. 나무도 울창하고 길도 잘 닦아놓아서 시원하게 산책하기에는 제격이었다. 웬만한 관광지는 다 둘러봤고 할 일도 없어서 그냥 산책하기 좋은 곳들만 마냥 걷는 날을 보냈다.

밤에 뭔가 아무것도 안 하면서 보내기는 심심해서 트립어드바이저를 뒤져보다가 넵스키 대로 주변에 블루스클럽 하나와 재즈바 하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요즘 한국 인디 블루스를 들으면서 다니기도 하고 블루스클럽이 더 가깝기에 거기를 한번 가보기로 결심했다. 사실 불곰성님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익히 들어 겁이 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러시아에 2주 가까이 있어 보니 그냥 이들도 평범한 사람인걸 깨달았기에 용기를 내어 가보기로 했다. (그래도 매우 큰 용기를 내어야 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불곰이나 스킨헤드는 무슨, 할아버지가 네살배기 손자를 데려와서 음악을 듣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입장료 단돈 300루블에 라이브 블루스 공연을 볼 수 있다니!! 여긴 천국이다. 내 테이블에 웬 술 취한 아줌마가 같이 앉았는데, 나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면서 보드카랑 샴페인이랑 아이스크림까지 나눠줬다. 별 희한한 경험을 다 하지만 조건없는 호의가 그리 싫지 않았다. 긴장됐던 마음은 흥겨운 음악과 적당한 술기운으로 날아가 버리고 현지인이 된 기분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잇었다.


그리하여 떠나기 전날에도 여기를 또 들렀는데 너무 흥이 난 나머지 맥주도 두잔이나 시켜 먹고 안주까지 실컷 시켜 먹어서 900루블이라는 거금을 내야만 했다. 어쨌든 매우 강추한다! 블루스 음악을 좋다한다면 겁먹지 말고 가 보길 추천. 이름은 'Jimmy Hendrix Blues Club' 이다.

블루스클럽에서 말고도 또 공연을 봤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사이트를 문득 들어가 보았는데 내가 이 도시에서 지내는 마지막 날에 공연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싼 좌석이 고작 400루블밖에 하지 않아서 바로 표를 끊고 가게 되었다. 소규모의 오케스트라 공연이었는데 주로 바흐의 작품을 연주했다.

집에서 좋은 음악을 찾아 들을 때는 그냥 음악을 듣는 것 자체가 목적이기에 음악을 고를 때 훌륭한 음질과 균형있는 녹음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다. 똑같은 이유로 공연장에서 공연을 볼 때는 음악이 연주되는 바로 그 현장에 있기에, 그런 음질이나 현장감 따위의 것들이 극대화되어서 최고의 컨디션인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라이브 음악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연장이 그리 크지는 않고 매우 격식있는 공연도 아니었다. 지휘자의 신발끄는 소리부터 옆자리 앉은 아이의 소곤대는 소리까지 모두 들어야 했다. 이런 걸 원래 매우 거슬려하는 성격인데 그 날은 왜 그랬는지 그런 소리들이 매우 편안하게 들렸다. 훌륭한 현장감 속에서 현의 떨림이 그대로 전해지는 음악을 듣는 그 자체를 떠나, 이 음악과 내가 같은 장소에 있다는 느낌 때문에 뭔가 따뜻하고 기분좋은 기운이 몸에 돌았다. 아마도 그런 사소한 소음들이 내가 이 음악과 한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이만하면 여행하기 좋은 도시다. 여행하기에도 편하고, 음악과 미술 등 문화가 있는 도시다. 짧지만 깊은 역사가 서린 도시이기도 하다. 다 좋은 도시인데, 여행한지 2주째가 되어가니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얼굴을 맞대고 한국말을 해 본지가 언제인지. 고작 러시아말로 '안녕' 이나 '감사합니다' 따위나 할 줄 아는 벙어리로 살다 보니 답답하기도 하고, 가볼만한 곳에 다 가보고 나면 할 일이 없다는 것에 뭔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냥 쉬고싶으면 쉬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싶으면 아무것도 안 하면 되는데, 큰 돈 들여 여행와서 고작 앉아서 음악이나 듣고 있냐 하는 생각 때문이다. 여행이란 참 신기하다. 안 하고 있을 때는 하고 싶고, 하고 있을 때는 익숙했던 것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질 때가 있다. 남의 떡이 커보인다는 말도 있듯 사람이 하는 일이 다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뭔가 해야한다는 그런 강박관념을 좀 떨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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