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형용할 수 없던 기차에서의 6일 18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감옥에서 나오면 아마 이런 기분일까? 기차역을 나서고, 메트로를 타러 걸어가며 그런 생각을 했다. 고작 몇 백 미터를 걸었을 뿐인데, 일주일 간 워낙 걷지 않았으니 그마저도 어색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발길 닿는 곳이면,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나의 의지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새로웠다. 온전히 그 나의 의지로 9288km를 달려왔는데도 말이다.


메트로를 타고 숙소에 갔다. 듣던 대로 모스크바의 지하철역은 고풍스러운 멋이 있었다. 천장엔 샹들리에가 있고 곳곳에는 조각상과 그림이 있었다. 과장 조금 보태 박물관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젠 너무도 당연한 스크린도어는 당연히 찾아볼 수 없었다. 플랫폼과 열차는 바짝 붙어있고 급정거와 급출발을 밥 먹듯이 했다. 화려하면서도 불친절한, 내 머릿속의 러시아에 대한 이미지를 메트로 역에서 온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가격이 싼 것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어딜 가든지 50루블(약 1000원) 밖에 하지 않는다.

하나 신기했던 건 환승역은 노선에 따라 역 이름이 각각 다르다는 점이었다. 1호선 Komsomolskaya 역에서 타서 9호선 Borovitskaya 역에서 내려야 했는데, 1호선과 환승역이라 그냥 타고 가다 보면 내릴 역이 나오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노선도를 아무리 찾아봐도 Borovitskaya 역은 나오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그 역은 1호선의 Biblioteka im Lenina 역과 같은 환승역이었던 것이다. 같은 역이라도 1호선은 이 이름, 9호선은 저 이름이니 처음엔 적잖이 당황했다.

호스텔에 도착해 드디어 6일만에 샤워를 했다. 샤워기에서 내 머리 위로 물이 쏟아져 나올 때의 그 쾌감이란! 갑자기 샤워하던 중 단수가 되어 좋던 기분을 살짝 방해받긴 했지만 조금 기다렸더니 다시 물이 나왔다. 정말 문자 그대로 '빡빡' 씻었다. 머리도 세 번이나 감았다.


첫날은 좀 쉬고 싶기도 하고 많은 곳을 돌아다닐 시간도 없어 아르바트 거리만 둘러보기로 했다. 별 건 없고 그냥 카페와 음식점, 기념품 가게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다. 하지만 아르바트 거리에서 내가 꼭 보고싶었던 곳이 있었는데, 바로 8-90년대 활동했던 러시아 밴드 '키노'의 기타리스트/보컬 빅토르 최를 기리는 골목이었다.

아르바트 거리를 걷다 보면 한 쪽에 그래피티로 가득한 작은 골목이 하나 있다. 벽의 중간에는 빅토르 최의 사진이 있고 그 앞에 항상 그를 기리는 사람들이 놓아둔 꽃, 신문, 담배 등이 있다. 빅토르 최는 공산주의가 쇠퇴하고 있던 소련 말기에 저항과 자유의 메세지를 노래한 가수였다. 1990년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키노의 공연에는 10만명에 가까운 관객들이 운집했는데, 빅토르 최의 노래를 목청높여 따라부르던 수많은 관객들의 에너지가 공연장 밖으로까지 퍼져나가 대규모 시위로 번진 일화도 있었다. 그 후 소련의 집중 감시 대상이 된 빅토르 최는 약 한달 뒤에 의문의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게 된다.

그 골목에서 알 수 없는 기분으로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찬찬히 그 벽을 둘러보며 러시아인들이 얼마나 빅토르 최를 아끼고 그리워했는지 상상하고 있을 때 쯤 기타를 멘 젊은 남자가 와서 그의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도 여행을 떠나기 전 빅토르 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노래도 몇곡 찾아 들었기에, 웅얼거리면서 노래를 같이 불렀다.

그 때는 그 청년 말고는 나밖에 없었기에 노래가 끝난 후 청년이 나에게 러시아어로 뭔가를 물어봤다.
"?!!&@&!₩!!??"
"핳... 야 녜 가바류 파 루스끼 (저 러시아 말 못해요)"
"티 가바리시! (하는데? ㅋㅋㅋㅋ)"

뭔가 웃긴 대화였다. ㅋㅋㅋ 내가 러시아말을 못한다는 말을 러시아어로 하고 있다니. 내가 당시 알고 있던 러시아아어는 딱 다섯가지였다. 안녕, 고마워, 한국인, 여행자, 나 러시아 말 못해.

"어...음... (손짓 발짓) 야 루스끼, 티? (나는 러시아인, 너는?)"
"아하, 야 까레이스키. 뚜리스트. (저는 한국인이고 여행자에요)"
"(빅토르 최 사진을 가리키며) 으흠??"
빅토르 최를 아냐고 물어보는 것 같길래 대뜸 한국에서 들었던 노래 제목을 말해주었다. "아 꾸꾸쉬카!" 하면서 금방 그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때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오는 사람마다 모두 노래를 열창하기 시작했다. "꾸꾸쉬카"가 끝나고 나서도 몇 곡을 한참동안 연주하고 사람들은 모두 따라 불렀다. 키노가 매우 옛날에 활동했던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모인 대다수가 젊은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한참이 지나서도 모스크바의 제일 유명한 거리 한쪽에 그를 기리는 골목이 있고 사람들은 매일 그곳에 모여 그의 노래를 부른다는 그 사실이 나를 알 수 없는 오묘한 느낌과 감동으로 빠져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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