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행자나 그러하듯이 여행 전에는 마음이 설레는 느낌으로 가득 찬다. 게다가 그 여행이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것이거나 로망 따위의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기 전 내가 그랬다. 6일 18시간 내내 기차를 탄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시베리아 벌판의 광활함을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는 게 기대가 되었다. 이미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경험한 많은 블로거들의 글들을 보고 나도 그럴 것이란 기대를 가득 가졌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보드카를 마시고, 한국 술 게임을 가르쳐 주고, 엄청난 창 밖 풍경을 감상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가만히 사색할 시간을 가지고..

하지만 아마 5일째 되는 날 몇몇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평생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저주하며 살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밤 11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야 했다. 역에서 짐 검사를 마치고도 시간이 조금 남아 한국 야구 중계를 보면서 시간을 때웠다. 드디어 출발 시각이 다가오고 내가 탈 열차가 기다리고 있는 플랫폼으로 갔다. 사진에서만 봤던 9288 표지석이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 모스크바까지 9288km를 달린다는 말이다. 말이 9288km지 이 길이가 지구 둘레의 1/4 가량 된다는데, 그 말은 이 열차를 한번 타고 세번을 더 타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이 자리에 다시 올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 사실을 너무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다.

드디어 기차를 탔다. 생각보단 괜찮을 것 같다. 침대칸의 길이가 내 키보다 조금 작아 발끝이 복도 쪽으로 조금 나가는 건 흠이지만, 매트리스도 꺼지지 않고 잠자리도 꽤 편하다. 자정 가까운 시각에 출발을 해서 바깥에 보이는 거라곤 가로등과 나무의 실루엣 정도였지만, 그래서 그런지 야간기차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낭만적인 기분도 조금은 든다.

하지만 이 낭만적인 기차는 출발한 지 두 시간 만에 생지옥으로 변했다. 기차는 새벽에도 선다. 새벽에도 정차해서 사람들을 태우고 내려준다. 불은 꺼지지 않고 애들이 운다. 새벽 두시에 탄 내 옆자리 아줌마는 이 객차 안에서 제일 큰 소리로 코를 곤다. 어떻게 잠이 드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지만 밖이 환해서 눈을 떠 보니 다섯 시간을 겨우 잔 것 같다.


나는 6인실이었는데, 사실 이것도 말만 6인실이고 실제로는 복도를 중심으로 한 쪽에 위아래로 침대 2개, 다른 한 쪽에 위아래로 침대 4개가 있는 오픈된 객차다. 그 중에서도 내 자리는 4개가 있는 쪽의 순방향 1층 자리였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과 많이 부대끼며 살 수 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서로 얘기도 하고 놀기도 하며 정겨운 모습으로 기차에서의 일주일을 보내기를 기대했지만, 이런 공간적인 특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더러 있었다.

일단 침대가 2층이고 사진에서 보이는 테이블은 당연히 1층에만 있기 때문에 2층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 등 테이블을 쓸 용무가 있으면 자연스레 내 침대에 앉아야 한다. 생각해 보면 별 다른 수가 없지만 이것도 일단 너무 싫었다. 아무리 어쩔 수 없다지만 나에게 묻지도 않고 그냥 내 자리에 막 앉아대니, 얘네는 자리의 개념이 없나? 그런 생각으로 내내 스트레스를 받았다.

러시아인들 얘네 암내 장난 아니다. 솔직히 나도 6일동안 샤워를 못 했으니 할 말은 없다만, 진짜 밥 먹고 있는데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팔을 들면 무의식적으로 '오우...' 소리가 나온다 정말. 서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으니 서로의 체취가 더욱 가깝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다.


4일간 식사는 계속 같은 메뉴였다. 출발하기 전 블라디보스토크의 마트에서 라면과 빵과 물만 잔뜩 사 갔다. 물도 잘 안 마시게 되는데, 열악한 화장실 상태와 콜라보하여 심각한 변비를 유발한다.

어찌되었건, 지난 밤에는 도저히 코 고는 소리에 잠이 오지 않아 맞은 편 아줌마가 미워 죽을 뻔 했지만,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나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며 차 한잔 마시겠느냐고 티백을 건넸다. 그리곤 계속 가방에서 이것저것 음식들을 꺼내서 주었다. 내게 뭔가 계속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아들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나중에야 내가 번역기를 건네 조금은 서로 뜻이 통했지만, 대체 알아듣지도 못 하는 나 같은 동양인에게 무슨 말을 그리 하던지. 그래도 서로 얼굴을 보며 알아듣지도 못 하는 대화를 계속 하다가 보니 간밤의 짜증났던 감정들은 어느 새 눈 녹듯이 사라져 있었다.

오후가 되어서는 하바롭스크 역에 한 시간 동안 정차했다. 기차는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출발해 수 많은 역을 거친다. 개중에는 정말 작은 역도 있고 큰 역도 있는데, 큰 역에서는 보통 30분에서 1시간 가까이 정차를 한다. 이 시간이 횡단열차를 타면서 바깥바람을 쐴 수 있는 유일한 휴식시간이다. 담배를 손에 꼭 쥐고 있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기차에서 내려 담배를 꺼내 문다.

플랫폼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웬 누가 와서 담배 한 대만 달라고 한다. 그 순간 어느 블로그에서 본 '담배를 한 번 주기 시작하면 다른 부랑자들이 몰려와 자기들도 담배를 달라고 한다'라는 말이 기억났다. 그래서 말을 못 알아듣는 척을 했다. 나에게 몇 번 담배를 달라는 몸짓을 하더니 그냥 가 버렸다. 주변에는 또 담배를 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벌써 많은 도움을 받았던 내가, 안 그래도 담뱃값이 싼 러시아에서 그 한 개피가 뭐가 그리도 아까웠을까?


창 밖 풍경은 정말 마음에 든다. 초록빛 들판과 나무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그 땅이 지평선에서 파란 하늘과 만나는 장면은 우리나라에선 보기 힘든 광경이다. 하지만 6일 내내 풍경이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루하다. 그리고 내리고 싶다는 생각만 미친듯이 든다. 홀로 서있는 나무를 보면 옆에 기대어 보고 싶고, 소담스럽게 피어있는 들꽃을 보면 한 두 시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다. 얕게 흐르는 계곡을 보면 발이라도 한번 담가보고 싶고, 울창한 자작나무 숲을 보면 깊게 숨을 한번 들이마셔보고 싶다. 6일동안 바뀌지 않는 그 풍경을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효과가 탁월한 희망고문이다.

​맞은편 아줌마가 내릴 때가 되었다고 한다. 어제 밤에는 코좀 곤다고 엄청 미워하고 싫어했었는데, 횡단열차 타는 신기한 동양인이라고 이것저것 챙겨주고 걱정해 준 게 너무 고마워서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라는 말을 번역기로 돌려 보여드렸다. 그랬더니 정말 당신의 아들을 보는 것 마냥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다. 모스크바까지 간다고 하니 공부하러 가는 거냐고 물으신다. 그래서 그냥 여행중이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러면 '빼쩨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줄임말)'에는 꼭 가봐야 된다고 하신다. 당연히 거기도 가지요.

내리기 전 나를 한번 꼭 안아주셨는데 마음이 정말 뭉클하고.. 이렇게 좋은 분인데 코 좀 골았다고 속으로 그렇게 미워했다니. 누가 대체 나쁜 놈일까? 함부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미워하지 말자.

라는 생각을 하며 잠에 들었지만 그 밤 아줌마가 떠난 자리에 또 코 고는 개XX가 내 옆에 탄다. 아니 진짜 이럴수가 있나.. 머리 끝까지 솟구치는 짜증을 이어폰을 끼며 억눌러본다. 그런데 새벽에는 인기척이 느껴져 깨 보니 웬놈들이 내 자리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다. 내 다리도 손으로 밀어버리고 자고 있는 내 옆에 대놓고 앉아서 보드카를 마시면서 떠들고 있다. 실눈뜨고 얼굴을 보니 머리는 빡빡 벗겨지고 졸라 무섭게 생겼다. 한번 깝쳤다가는 모스크바까지 운반되는 시체가 될 것 같아서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다시 잠을 자려고 애를 썼다.


다음 날 저녁에 되어서야 바이칼 호수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사실은 인터넷이 터질 때마다 지도를 켜서 지금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GPS를 통해 확인을 했다. 셋째 날 저녁이 되어서야 점점 바이칼 호수에 가까워지는 지도 위의 빨간 점을 보면서 언제쯤 호수가 보일 지 설레는 마음으로 눈 앞에 호수가 나타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설렘은 곧 경이로움으로 변했다. 바다같이 넓지만 잔파도 하나 없는 그 고요함이 정말 경이롭다는 말로밖엔 표현할 수 없었다. 바이칼 호수로 통하는 개천이 콸콸 흐르는 소리도 기차 너머로 들리고, 소풍 나온 가족, 나룻배 위에서 낚시하는 노인들을 볼 때면 모스크바 직통으로 표를 끊은 과거의 나 자신을 멍 들 때까지 때리고만 싶었다. 이렇게 기차에서 내리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게다가 마침 해가 질 시간이었다. 하늘의 색과 호수의 색, 완벽한 데칼코마니가 만들어졌다. 그저 숨죽이며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호수 옆 산을 보니 꼭대기에는 만년설이 있었다. 아아, 정말이지 내리고 싶었다.

다른 블로거들의 횡단열차 후기를 보면 보드카도 마시고 술게임도 하고 얘기하고 놀고 아주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는데, 왜 나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모르는 사람과만 4일 내내 주구장창 타야했던 것인가. 말을 못 하게 되고, 할 건 없으니 사람이 미쳐간다. 다른 것보다 이게 제일 힘들다. 하릴없이 시간만 지나가길 심신이 지친 상태로 바랄 뿐이다.

---------------

5일째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어김없이 어떤 무리가 1층에 잔뜩 앉아있어 심기가 불편한 상태로 일어났다. 뚱한 표정으로 눈을 비비고 있으니 나에게 어디서 왔냐는 둥, 어디로 가냐는 둥, 이름은 뭐냐는 둥 묻는다. 자기들의 이름도 소개해 주고, 무슨 일을 하는지까지 사진으로 보여준다. 이들의 호감이 싫지가 않아 번역기까지 동원해가며 떠듬떠듬 얘기를 이어가다 보니 그래도 친근함이 느껴진다. 같이 카드 게임도 했다. 한 세 판을 같이 했는데도 도저히 룰이 파악이 안 된다. 자신들이 일하는 모습까지 보여주며 한국에서는 용접 일이 잘 대접받냐고까지 물어본다. 나는 잘 모르지만 아마 좋은 직업일 거라고 알고 있다고 하니까 러시아에서는 그렇지 않단다. 전공을 묻길래 컴퓨터공학이라고 대답해 줬더니 한 사람이 나에게 고장난 핸드폰을 들고 온다. 이런건 수리센터에 맡기세요.

그 중 한 명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은 영어도 떠듬떠듬 할 줄 알고 나에게 관심도 많아 보였다. 모스크바는 구리고 '빼쩨르'가 짱이라는 얘기는 러시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 같았다. 과자도 계속 갖다주고, 훈제 베이컨과 빵, 바나나도 갖다준다. 바라빈스크 역에 내려서는 아이스크림도 사 줬다. 러시아 밀크 아이스크림 짱이라면서.

또 다른 사람들도 계속 음식을 나눠줬다. 저 사진 속에 있는 왼쪽 플라스틱 용기는 감자 스프? 같은 거고 오른쪽 캔은 돼지고기인데, 고기를 저 감자 스프에 넣어서 먹어보란다. 진짜 진짜 맛있었다. 음식 나눠준거 맛있다고 하니까 기념으로 사진 찍으래서 찍었다.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음식을 나눠먹다 보니, 불편하고 짜증나는 일 일색이던 그 기차가 어느새 너무나 편안해졌다. 내 옆에 누군가 앉는 것이, 내 테이블에서 음식을 먹는 것이, 그들과 내가 부대끼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친구가 되었으니까.

사실 4일째까지 만난 사람들도 모두 이 친구들처럼 좋은 사람들이었을지 모른다. 나에게 뭔가 일부러 불편을 주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었을거다. 그 동안의 기차 생활이 불편했던 건 러시아인들 모두가 자리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도, 배려가 없어서도 아닌 결국 내가 이들의 방식에 익숙해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알고 보면 이렇게 베풀기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내가 스스로를 가두는 벽을 치고 내가 스스로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무슨 운이 들었는지 그날 저녁에는 무려 영어를 할 줄 아는 러시아인이 탔다. (무려라는 말은 전혀 아깝지 않다.) 아침에 만난 친구들과 함께 그 영어 할 줄 아는 친구를 인간 번역기 삼아 별별 얘기를 다 나누었다. 


잘 버틴 기념으로 마지막 식사는 식당칸에서 고기수프를 시켜 먹었다. 더 이상 값싼 라면에서 느껴지는 탄수화물과 싸구려 조미료의 자극적인 맛으로 내 입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두 칸이나 건너가 식당칸으로 향했다. 뭔가 딱히 끌리는 음식은 없었지만 고기는 꼭 먹고 싶어 고기와 소세지가 들어간 수프를 시켰다.


어쨌든 그렇게 이 기차 여행은 끝이 났다.

이 기차를 누군가에게 추천을 해 줘도 될지 말지는 잘 모르겠다. 하나 확실한 것은,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한번에 직통으로 가는 것은 ​매우 심각하게​고려를 해 봐야 한다는 점이다.​​​ 꼭 꼭 적어도 바이칼 호수에서는 한 번 쉬어가심이.


'여행 > 2016 유라시아 일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D+14] 모스크바 여행 2  (0) 2016.05.29
[D+14] 모스크바 여행 1  (0) 2016.05.29
[D+4] 블라디보스토크 여행  (0) 2016.05.18
[D+1] 출발  (0) 2016.05.15
[D-20] 시베리아 횡단열차 티켓을 끊다  (2) 2016.04.2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