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에 타자마자 잠이 들었다. 혹시나 배멀미를 하게 될까 하는 걱정은 전혀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저녁 시간이 되었다는 안내방송에 깼다. 배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이 그렇게 좋지는 않아도 명색이 크루즈선이다 보니, 면세점이나 식당, 심지어 공연장 등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었다. 출발한 날의 저녁 식사와 다음 날 아침 식사는 뷔페 형식이었다. 만 원을 내고 다음날 아침 먹을 양까지 미친 듯이 흡입을 했다. 메뉴는 많지 않았지만 맛은 꽤 괜찮았다. 집밥 먹는 느낌도 들었고.

대부분이 나이 많은 단체관광객이고 내 또래는 거의 볼 수 없었다. 갑판에 나가 보았지만 칠흑같은 어둠 속에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동해에서 출발해 위로 가고 있으니 아마 왼쪽은 북한 땅이겠거니 정도의 생각만 할 수 있었다. 인터넷도 안 되고 심심해서 밥 먹고 금방 또 잠에 들었다. 그리고 배는 한참을 달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요람마냥 옆으로 살살 흔들리는 배 침대칸에서 부스스 일어나보니 어느새 아침 11시였다. 갑판으로 나가보니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가 많이 없고 평평하게 경사진 지형부터가 어제 떠나온 한국과는 많이 달랐다. 배를 타 본 적은 울릉도에 가거나 제주도에서 우도를 갈 때 정도 말고는 타 본 적이 없었기에, 배를 타고 다른 나라로 왔다는 사실 자체가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도착하고 나서도 한두 시간이 지나서야 배에서 내릴 수 있었다. 내리는 데에도 순서가 있었던 탓이다. 단체관광객들이 우루루 내린 뒤에야 몇 되지도 않는 개인 여행자들을 내려주었다. 같은 배를 타고 같은 곳으로 왔지만, 형형색색의 조끼를 입고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는 그들 사이에서 마치 난 이방인이 된 것 같았다.

배 안에서 그들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떤 한국인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혹시 유심칩을 살 계획이 있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자기는 유심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같이 사러 갈 수 있냐고 물었다. 나쁜 사람 같지도 않고, 이 여행에서 맨 처음 만난 다른 사람과 어떤 일이 있을지 기대가 되기도 했다. 그 아저씨와 같이 나와 항구의 어느 휴대폰 매장에 들어가서 유심을 샀다. 정말로 영어가 단 한 마디도 안 통한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지만, 유심을 사는 데는 몇 개의 숫자를 메모지에 적는 것과 고맙다는 인사 말고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저씨와 '샤오르마'라는 러시아식 케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같이 슈퍼에 가서 과일과 음료수 등을 샀다. 모두 이 아저씨가 흔쾌히 사 주었다.


이게 그 샤오르마. 대체 이걸로 3일 동안 몇 끼를 때웠는지 모르겠다. 하나에 100~200루블 정도 했는데, 초딩 입맛인 내 입에 정말 딱 맞는 맛이었다.


내 숙소가 위치했던 아르바트 거리는 유럽의 여느 도시의 풍경을 거의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하나 다른게 있다면 한국 화장품 브랜드 '잇츠스킨' 매장이 있었다는 것. 그것 뿐만이 아니라 슈퍼마켓에 가도 초코파이, 컵라면부터 시작해서 세제까지 한국말 상표가 그대로 적힌 제품을 팔고 있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이미 예전에 단종된 모델들이 많이 돌아다녔는데, 특히 버스가 그랬다. 러시아 시내버스에 'Dynamic Busan'이 적혀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빨간 정차 버튼 밑에는 멀쩡한 한국어로 적힌 한의원 광고가 있었다.


하늘이 점점 어둑해 질 때쯤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관광지인 해안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도처에 커플들이 깔린 것으로 보아 여기가 가장 유명한 데이트 장소인 것 같았다. 게다가 꽃을 들고 걸어가는 러시아 남자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무서운 소문과는 다르게 꽤 로맨틱한 사람들인가보다. 하긴,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인데 죄다 머리를 빡빡 밀고 길거리에서 스스럼 없이 사람을 패는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불곰성님' 이라는 유머로 포장된 고정관념이 이리도 무섭다.

커플들 뿐만 아니라 아이와 같이 나온 가족들도 많았고,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짙게 낀 구름 뒤로 해가 아직 밝게 비치고 있어 꽤 이국적인 풍경을 뽐냈다.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한참동안 바다를 바라봤다. 

호스텔 라운지는 음악도 좋고 인테리어도 좋았지만 방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침대 매트리스가 꺼져서 허리가 아파 잠이 오지 않았다. 사실 안 그런 호스텔을 찾기가 더 힘들지만.


아무튼 다음날엔 시내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잠수함 박물관에 처음 들렀는데, 100루블이라는 입장료 치고는 별로 볼 것이 많지는 않았다. 저 잠수함 안을 박물관으로 꾸며놓았는데, 온통 러시아어로만 설명이 되어 있고 영어 병기도 되어 있지 않아 어떤 말인지도 알 수 없었다. 원래 잠수함 안에 있던 시설들을 그대로 살려놓은 것이 많아서 좀 신기하기는 했다. 폭탄이나 미사일 비스무리한 것도 몇 개 있는 것 같았고..


블라디보스토크 항은 군항의 역할도 하는지 군함으로 보이는 배도 많았다.


2차대전 전사자를 기리는 공원과 그 뒤에 있는 자그마한 정교회 사원. 가운데 별 모양 안에 작은 불꽃이 있다. 이 '영원의 불꽃'은 러시아 어느 도시를 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4시간 365일 언제라도 꺼지지 않도록 각별히 관리를 한다고 한다.

지도에 있는 가 볼 만한 곳은 다 가본 나는 지도만 켜 놓고 정처없이 걸었다. 그러다 어느 공원에 다다랐는데, 평화로운 분위기가 꽤 마음에 들었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 사생대회를 나왔는지 단체로 앉아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 햇빛에 반짝이는 나무들까지 모두 마음에 들어서 또 앉아서 멍하니 있다가 나왔다. 알고 보니 이 곳의 이름은 포크로브스키 공원. 관광객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오롯이 이 곳에 터를 잡고 사는 시민들의 휴식처인 듯 했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럽이 있었다. 물론 수 많은 차에서 내뿜는 매캐한 매연과 수많은 한글상표가 섞인 반쪽짜리긴 하지만 생각보다 매력적인 도시였다. 그렇게 할 게 많은 곳은 아닌 듯 보이지만, 해안공원에 앉아 휴식과 사색을 만끽했던 것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아마도 유럽 여행이 생각나지만 그 곳에 갈 만큼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충분치 않을 때 한 번 다시 블라디보스토크가 생각나지 않을까.


----------

5/16 2234rub (방값 1300rub, 유심 550rub 포함)
5/17 350rub
5/18 852rub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