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빈에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로 넘어왔다. 첫 날 아침에 일어나서 창 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냥 잠깐 내리는 비 같지는 않았다. 비 오는 날에 무거운 짐을 들고 나가기도 싫어서, 여행 중 처음으로 카메라 가방을 숙소에 두고 나왔다. 빈에서 에코백을 하나 샀는데, 거기다가 지갑과 보조배터리, 지도만 넣어 가벼운 몸으로 숙소를 나왔다.

숙소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자그레브 중앙에 있는 유명한 공원이 있는데, 비 오는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정말 단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공원에 그냥 흔한 나무만 있는 게 아니라, 곳곳에 정원같이 꾸며놓은 곳이 있었다. 꽃 종류도 많고 심지어 어느 상자 안에는 파리지옥까지 있었다. 공원보다는 차라리 식물원에 가까워보였다.

비가 와서 더욱 진하게 느껴지는 꽃 냄새,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 비에 젖은 나뭇잎들. 비는 훌륭한 앰플라이퍼다. 모든 것을 증폭시킨다. 감정과 생각마저도 비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과하게 흘러댔다.

우산을 쓰고 텅 빈 자그레브 거리를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다.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없었다. 가져온 지도는 펼치지도 않은 채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발길 닿는 대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별 좋은 것을 본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베를린도 그랬었지만, 자그레브도 비와 참 잘 어울리는 도시같았다.

다음날에는 해가 떴다.

옐라치치 장군의 동상을 중심으로 자그레브의 중심 광장인 반 옐라치치 광장이 있다. 유로2016 시즌이라 그런지 광장에는 큰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앞으로 분주히 사람들과 파란 트램이 움직이고 있었다. 어제보다 확실히 북적거리는 느낌이었다.

어딜 가나 저렇게 꽃을 파는 노점이 있다. 살까 하는 생각이 굴뚝만큼 드는 예쁜 꽃들도 있지만 건네 줄 사람이 없기에 그저 좋은 눈요깃거리일 뿐이다. 저 곳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자그레브에서 제일 큰 시장에 다다른다. 이름은 돌라치 시장. 역시나 향긋한 과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참지 못하고 걸어다니면서 먹을 체리 1킬로를 샀다. 한화로 4000원 정도였으니 한국과는 비교도 못하게 싼 데다가 맛도 있었다. 하루 종일 꺼내먹으며 도시 이곳저곳에 씨를 뱉고 다녔다. (길에는 뱉지 않았다)

시장에서 조금 올라가면 자그레브 대성당이 있다. 한국인 단체관광객을 여기서 처음 만났다. 그러고 보니 이제 한국말이 주변에서 많이 들린다.

걷다 보니 고르니 그라드라고 하는 윗동네에 다다랐다.


그 곳에 자그레브 여행 하면 꼭 나오는 이 성당이 있다. 이 앞에서 아까 대성당에서 만난 한국인 단체관광객을 다시 만났다. 한국인 가이드의 설명을 몰래 엿들었는데,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저 성당 지붕에 있는 두 개의 문양에 얽힌 얘기부터 정문에 있는 조각상에 대한 얘기까지. 아무것도 몰랐으면 그저 아.. 좀 특이하게 생긴 성당이다 그러고 사진만 찍고 지나갔을텐데 역시 알고 보니까 재밌다. 아는만큼 보인다. 왜 가이드를 끼고 여행하는지 이제 알았다.

고르니 그라드 전망대에서 바라본 자그레브. 구시가지에서 볼 건 다 봤고, 시간이 좀 남았길래 조금 멀리 있는 동물원에 가 보기로 했다. 걸어서 4-50분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그냥 걸었다.

동물원 옆에 공원이 있길래 잠깐 걸었다. 한적하고 좋았다. 관광객은 없고, 현지인들이 운동하러 오는 공원같았다.

동물원이 엄청 작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고 있을 건 다 있었다. 그 동물원의 퀴퀴한 냄새를 오랜만에 맡으니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뱀도 보고 새도 보고 거북이도 보고 말도 보고 니모랑 도리도 보고 새끼호랑이도 보고 낙타도 보고 사자도 봤다.

누군가는 자그레브가 볼 거 없는 도시라고 당일치기도 괜찮다고 하는데 나는 이틀을 꽉 채워 봤는데도 재미있었다. 첫 날에 비가 왔던 게 정말 좋았다.

----------

6/18 282kn (방값 포함)
6/19 120.8kn
6/20 143.5kn


'여행 > 2016 유라시아 일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D+38]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여행  (0) 2016.06.27
[D+36] 자그레브 여행 2 (실연박물관)  (0) 2016.06.27
[D+41] 근황  (2) 2016.06.26
[D+28] 바르샤바 여행 3  (0) 2016.06.13
[D+28] 바르샤바 여행 2  (0) 2016.06.1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