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폴란드를 떠나 독일 베를린, 오스트리아 빈,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플리트비체 자다르 스플리트를 거쳐 두브로브니크에 있다.

일일히 사진 보정하고 리사이즈해 올리는 것, 그리고 비록 일기장에 일기를 쓰긴 하지만 그걸 토대로 글을 다듬고 보기 좋게 정리하는 일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게다가 글을 쓰지 않은 제일 큰 이유는.. 그냥 이젠 별 감흥이 없다. 안 그래도 그동안 쓴 글의 반은 부정적인 말이었는데 이젠 정말 좋은 얘기를 쓸 자신이 없어졌다.

비록 이 곳에 글을 올리는 것은 나 혼자의 여행을 정리하기 위한 목적이 제일 크긴 하다. 하지만 각종 도시 이름으로 가득 찬 유입 검색어 목록을 보면 내가 이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를 찾아주시는 분들은 여행을 준비하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내 블로그에 들어오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부정적인 나의 글들이 작게 혹은 크게 그 분들의 여행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하니 쉽사리 글을 쓸 수 없었다.

내가 여행을 다녀봐서 잘 안다. 우연히 찾게 된 그런 블로그의 글 하나하나가 여행자의 다음 행선지를 정하기도 하고 정해진 행선지를 빼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다른 사람이 방문하면 충분히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여행지이지만, 여행지와는 관계없는 나의 마음 상태나 그런 것들이 여행을 종종 재미없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것들 때문에 그 여행지를 객관적으로 나쁜 곳인 양 평가하고 그것이 단 한 사람의 여행에라도 영향을 준다면 그것보다 속상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은 그냥 내 일기장에만 적기로 했다.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더워지는 날씨에 체력 소모가 많이 심해짐을 느낀다. 날씨와는 관계없이 하루에 평균 15km, 많으면 25km까지도 걸었다. 날씨가 좋을 때는 그렇게 걸어도 숙소에 돌아와서 글도 쓰고 이것저것 할 에너지가 남아있었지만 이젠 그렇지가 않다.

베를린과 빈은 썩 괜찮았다. 자그레브도 걷기에 좋은 도시였다. 플리트비체는 예쁘긴 했지만 기대를 너무 많이 한 탓인지 그렇게 큰 감흥은 없었다. 오히려 십자가 언덕에 가는 길에 만난 들판과 하늘이 더욱 감동적이었던 것 같다. 자다르는 작았고 생각보다 너무 사람이 많았다. 한적하게 쉬려고 간 도시였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적잖이 실망했다. 스플리트는 유흥을 위한 도시였다. 돈이 없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사람들로 꽉 찬 바와 음식점이 늘어선 바닷가 거리 앞에서 맥주 한캔을 슈퍼에서 사 홀짝이면서 바다를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것 밖에는 할 게 없었다.

돈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 돈을 아끼는 것과 돈이 없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돈을 쓰지 못하는 것은 천지차이이다. 가끔은 참 이런 내가 비루해진다.

그렇게 할 일 없이 그냥 걷기만 했기에 많은 생각을 했다. 생산적인 고민이나 생각은 아니고 그냥 지나갔던 일들이 문득문득 장면장면 떠오른다. 짧게는 여행 중이나 한두 달 전 있었던 일부터, 길게는 초등학생 때 있었던 일들도 떠오른다. 굵직한 일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정말 사소하고 뜬금없는 장면들. 어쩌다 좀 큰 일이 떠올라도 그 속의 어느 한 장면들이 문득 떠오른다. 여행 전에는 한번도 생각나지 않았던 일들도 가끔씩 떠올라 나를 놀래킨다. 그래,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경치가 괜찮은 곳이면 몇 시간이고 앉아 그런 일들을 회상하는 것이 요즘의 주된 일과이다.

그러고 보면 이러고 다니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애초에 혼자 떠나오자고 결심한 이유중에는 그런 것도 있었으니까. 그동안 살아왔던 것을 정리도 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지 생각을 좀 해보고 싶었다. 단 앞의 것은 많이 했는데 뒤의 것은 별로 한 적이 없다. 사실 생각하려고 하면 막막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지금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게 많다는 것을 지금은 어렴풋이 안다. 그래서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래도 당장 복학하고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는 많은 고민과 다짐이 필요한 것 같다.

집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많이 했다. 내게 익숙했던 모든 것이 그립다. 35도가 넘는 온도 속에서 하루종일 걷고 땀에 흠뻑 젖어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정수리에 새똥을 맞았던 날에는 정말 뭐든 집어치우고 공항으로 가버리고 싶었다. 정말로 예약금을 걸어둔 것만 없었다면 비행기 시간을 바꿔버리고 지금쯤 집 침대에 누워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런 것들도 언젠가는 추억이 될 것이다. 모든 기억은 언제나 미화된다. 그런 생각으로 지금 이 그다지 재미있지 않은 여행을 꾸역꾸역 계속 해나가고 있다.

잘 하고 있는 거겠지? 아마 그럴 것이다. 나의 근황을 이야기하면 대부분이 매우 부러워하는 티를 내니까.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누군가가, 많은 사람이 부러워 하는 것을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나도 살면서 앞으로 해볼 수 없는 것을 하고 있으니까 잘 하고 있는 것이겠다.

그래도, 가슴 한켠에 지워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는, 도저히 이걸 표현할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이 감정 혹은 생각때문에 쉽사리 확신할 수가 없다. 그냥 잘 하고 있는 거라고 계속 되뇌일 뿐이다. 굳이 여행에 대한 얘기만은 아니다. 그 어느 것도 마찬가지다.

돈이 없어서 밥은 대부분 피자로 때운다. 러시아에서는 거의 케밥을 먹었고 발트쪽에서는 팬케익, 그 이후에는 거의 피자다. 삼일 연속으로 아침 저녁을 피자로 때운 때도 있다. 너무 탄수화물만 많이 먹는 것 같길래 어제와 오늘은 큰 마음 먹고 고기를 먹었다. 그럴 때 행복하더라.

그냥.. 그렇다. 돈이 없어서 식사는 대충 때우고, 버스나 지하철은 타지 않고 걸어다니며 여행을 한다. 가끔 재밌는 것을 본다. 이게 근황이다. 사람들에겐 그렇게 얘기한다. 하지만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그 근황 뒤엔 많은 것들이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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