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가를 떠나 리투아니아 빌뉴스로 가는 길에, 리투아니아에서 4번째로 큰 도시라는 샤울레이에 들려 십자가 언덕을 방문해보기로 했다.

샤울레이 버스터미널에서 Hill of Crosses에 어떻게 가냐고 물으면 Domantai 라는 역까지의 왕복 티켓을 1.66유로에 살 수 있다. 샤울레이에서는 버스로 약 20분 거리이며, Domantai 역에서 내려서 걸어서 10~15분 거리에 십자가 언덕이 있다.


역에서 내려서 십자가 언덕까지 길을 걸어갈 때가 정말 지금까지 여행중에 손에 꼽는 가슴이 벅찬 순간이었다. 그냥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 한 들판과 하늘인데도, 어쩐지 이 곳에선 좋아하는 사람을 마주한 것 마냥 심장이 두근거렸다. 쏟아질 듯이 만발한 구름과 초록빛깔 넓디넓은 초원이 있는, 사람 하나 다니지 않는 외길을 하늘을 보며 혼자 걸어가는데.. 그야말로 가슴이 벅차다는 말 밖에는 그 기분을 설명할 길이 없다. 발트해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이게 정말 좋다. 어딜 가든 하늘은 파랗고 초원은 넓고 푸르다. 사람도 없어서 김동률의 '출발'을 들으며 혼자 열창을 하며 걸었다.

십자가 언덕은 내 생각보다 그렇게 크진 않았다. 약 건물 2~3층 높이 정도 돼 보였다. 그래도 이정도로 많은 십자가로 뒤덮인 언덕을 보니.. 음 사실 딱히 별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냥 음 대단하다~ 정도?

하지만 이 언덕에 얽힌 역사를 알게 되었을 때는 저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종교가 금지된 소련 치하에 있던 시절, 낮에는 소련이 이 곳을 불도저로 밀어버리면 밤에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다시 십자가를 놓아 언덕을 채웠다고 한다. 그렇게 지켜낸 이 언덕은 이제 가톨릭 신자들의 성지같은 곳이 되어 매년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고 한다.

많다. 정말 많다. 약 10만개정도의 십자가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언덕 뒤로 넘어가 멀찍이서 바라본 언덕의 풍경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사실 아까부터 온 신경은 주변의 하늘과 초원에 쏠려있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탈 때부터 소원이었던 넓은 풀밭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여기서 드디어 성취를 했다. 깔 것 하나 없이 풀밭에 누우니 불편하고 따갑기도 했지만, 바람 소리를 들으며 시선에 꽉 차는 하늘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내가 지구에 안긴 듯한 느낌이 든다.

사실 샤울레이를 중간에 거쳐가면 리가에서 빌뉴스로 바로 가는 것보다 차비가 배 이상은 더 든다. 십자가 언덕은 쏙 반할 정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주변 풍경이 너무 좋아서 돈이 아깝지는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서 정말 오랜만에 한국인을 만났다. 사실 따지고 보면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난 그 아저씨 이후로 한국인을 만나는 게 처음이다. 잠깐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야기 자체를 할 일이 많지 않고 그마저도 영어로 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었는데, 한국말을 써서 말을 하고 있다니. 버스를 같이 타고 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딸기와 과자같은 것도 얻어먹게 되었다. 별 것 아닌 일이었지만 그들이 떠나고 난 후 괜시리 눈물이 날 뻔한 것은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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