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에 제주에 갔었는데 불과 두 달만에 제주에 또 가게 되었다. 근로자 휴가 지원사업으로 생긴 포인트가 20만원 가량 남았었는데 딱히 쓸 곳이 제주행 항공권 말고는 없어서... 안 쓰면 없어지는 돈이라 후딱 다녀오게 되었다

금요일 저녁에 반차 내고 회사에서 바로 공항으로 가서 토요일 하루 놀고 일요일 점심에 올라오는 여느 때와 같은 일정.

항상 버스 여행을 시작하는 포인트. 이제 이 곳이 하도 익숙해서 마치 집 앞 같은 느낌이다

원래 버스에 타서 지도를 뒤져보다가 어디에 내릴 지 즉흥적으로 결정하지만 오늘은 먼저 갈 데가 있다. 어제 숙소에 도착해서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이상순 씨가 운영하는 '롱플레이' 라는 카페 얘기가 나왔는데 마침 캐치테이블에 검색해 보니 예약할 수 있는 자리가 남아있었다. 이건 가야지! 혹시나 이상순 씨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하지만 이상순 씨는 없었다. 아침 일찍 오픈 시간에 출몰(?)하신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점심 바로 전 타임에 가서 그런지 안 계시더라. 나는 커피 세트와 치즈케이크 하나를 시켰는데 커피도 케이크도 모두 맛있었고, 이상순 씨가 직접 고르신다는 플레이리스트를 작은 카드에 담아서 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음악이 넘 좋았다

'롱플레이' 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제주에도 생긴 그 핫한 가게 '런던 베이글 뮤지엄'이 자리잡고 있다. 카페에서 나오기 전에 캐치테이블로 미리 포장 예약을 해 두고 슬슬 걸어갔다.

넓은 부지에 갑자기 귀엽게 들어서 있는 런던 베이글 뮤지엄. 사람이 매우 많다...

증말 많다. 줄을 따라 가면서 빠르게 빠르게 베이글을 집어가지 않으면 괜히 눈치가 보일 만큼 사람들이 뒤에서 계속 몰려와서 그냥 느낌만 보고 베이글을 골랐다. 뭐가 맛있는 건지도 잘 모르고...

급히 포장을 해서 밖으로 나와 찬 바람이 불어오는 벤치에 앉아서 먹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침착맨 유튜브에서 잠봉뵈르 쿡방을 하는 바람에 갑자기 잠봉뵈르 베이글이 땡겨서 하나 샀는데, 미친듯한 느끼함에 정신을 잃어버릴 뻔 했다. 마실 것도 따로 없었는데 뭔가 남기기도 좀 그래서 꾸역꾸역 끝까지 다 먹었다. 온 몸이 지방으로 변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늘의 마을은 김녕리로 결정.

김녕리 마을 가장 왼쪽 구석에 있는 일희일비라는 책방에 들렀다

책 종류도 얼마 없는 고작해야 몇 평짜리 작은 책방에 가면 구석구석 어떤 책들이 있는지 전부 훑어보게 된다. 삼색 애옹이도 한 마리 있었고, 책을 둘러보고 있으니 차도 한 잔 주시던 친절한 사장님도 계신 너무 정다운 책방. 이런 곳에서 사진도 찍고 한참동안 구경하다 보면 빈 손으로 나오기가 좀 그래서 재밌어보이는 책을 하나 사 들고 나왔다.

한적한 마을을 구경하며 좀 걷다가

바다 앞 방파제에서 잠시 넋 놓고 멍을 때린다. 날도 흐리고 파도가 센 날이라 으스스하다.

애옹이 찾기 게임

갑자기 나타난 어느 무인소품점

영수증이 벽에 한가득 붙어있다. 뭔가 괜찮은 게 하나 있으면 사려고 마음먹었었지만 음... 제주 소품샵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들뿐.

'저승돈 벌러 감쩌' 무시무시한 제목의 벽화

카나라즈 미츠케마스...

프레임과 바구니와 벽이 깔맞춤이라 귀엽다...

추워서 잠시 몸을 녹이려 들어간 '모멘터리 커피'

노란색을 좋아하는 마을인가... 암튼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색깔

크림이 들어간 맛난 커피를 홀짝홀짝 들이키며 가져간 책을 좀 봤다.

겨울 바다도 매력이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오래 멍 때리고 있을 날씨가 아니다. 해도 떨어지며 슬슬 찬 기운이 더욱 강해지자 오늘은 이만 철수하기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삼색 애옹이와 또 접선. 완벽한 애옹이 자세구만...

이 날 저녁에는 어딘가 바에 가 보고 싶어서 한 군데를 찾아갔는데...

세상에 들어가자마자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분위기도 미쳤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한 권짜리 책방' 도 있다. 주인장 부부가 엄선한 책 한 권만이 딱 놓여져 있는...

음식도 미쳤구... 이 날 내가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 약 세 시간동안 손님이 나밖에 없었다. 사장님 부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너무너무 정말정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 바에서 (아마 내가 기억하기로는) 난생 처음 위스키를 마셔보았다. 하이볼이야 당연히 마셔본 적은 있었지만 니트로 위스키를 마셔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와... 정말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것이 어른의 맛인가 싶은 느낌. 심지어 그게 피트 위스키인 라가불린 8년이었는데, 피니쉬로 느껴지는 장작 향, 피트 향이 저절로 눈을 감고 음미하게 만들었다. 피트 위스키에 대해 "Love or hate, there's no between" 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정말 호불호가 갈리는 맛과 향인데 너무나도 내 입맛에 잘 맞았다. 그 이후로 위스키에 완전히 빠져서 위스키 유튜브도 찾아보고 마트나 리쿼샵에 가서 위스키를 집에 몇 병 사다가 데일리로 한 잔씩 먹는 위스키 처돌이가 되었다.

바 자체도 너무 내 취향에 딱 들어맞는 공간이었다. 손님은 나만 있고 아직 입장한 지 얼마 안 되어 주인분과 얘기를 시작하기 전 뭔가 어색한 타이밍에 계속 두리번거리며 바를 둘러봤는데, 진짜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인테리어가 너무 좋았다. 소품 색깔과 디자인 하나하나마저도 정확히 이 공간에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만 들여놓은 것 같은 느낌...? 이 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심지어 이 바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데, 혹시나 해서 여쭤보니 그것도 이유가 있었다. 아무튼간에 제주에 가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어났다.

이번처럼 내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모험을 하다가 내가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되는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 그래서 여행을 놓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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