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여름에 연구실을 나와서 제주에서 한달살이를 하며 취준을 한 뒤로 일년에 못 해도 한두 번씩은 제주에 가고 있다. 그 전까지는 나에게 제주란 여느 관광지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 한달살이 이후로는 제 2의 집 같은 곳이 되었다. 렌트도 안 하고 항상 가는 게스트하우스에 가서는 지내는 동안 별 관광도 하지 않는다. 느즈막하게 버스 타며 돌아다니다 바다 구경하고 책도 보고 콧바람도 쐬고 그런 시골집에 쉬러 가는 느낌으로 말이다. 그래서 내겐 제주에 가는 것이 거창한 여행이라기보다는 편히 지낼 곳에 잠시 쉬러 가는 느낌에 가까워서 그 동안 따로 제주에 갔던 기억을 정리하지 않았었다. 그래도 그런 곳에서의 기억 또한 소소한 추억이 될 수 있기에 지금부터 짤막하게 기록을 이어가려 한다.

보기에 따라 좀 징그러울 수 있지만 제주에서의 첫 과업을 수행하러 세화 쪽에 갔을 때 제일 먼저 시선에 들어온 장면이다.

선물을 사고 난 다음 먹은 카레우동. 작년에 어쩌다 들른 곳인데 괜찮아서 다시 방문해 보았다. 전혀 카레우동같이 생기지 않았지만 잘 뒤적이면 군침도는 카레 냄새가 올라온다.

얌전하고 늠름한 친구

새빨간 열매가 진뜩 달린 나무가 곳곳에 있었는데 참 보기 괜찮았다

세화에서 볼 일을 다 보고는 바로 삼양 쪽으로 가서 아는 분을 뵈고 왔다.

저녁에는 말고기도 먹고. 기름이 가득 낀 부위는 갈빗살인데 말의 기름은 마유라고 해서 몸에 좋고 특히 숙변을 밀어내는 데 직빵이라나.

저녁에는 게스트하우스에 모인 사람들과 사장님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현생에서는 주변이 온통 개발자 아니면 계속 알고 지내던 비슷비슷한 사람들인데 아예 딴 세상에 사는 것만 같은 사람들을 만나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런 식으로도 돈 벌며 살 수 있구나 하는 아이디어도 얻고, 어떤 곳이 여행하기 좋다더라 하는 정보도 얻고, 가끔 시간이 맞으면 다음 날 밥을 같이 먹거나 같이 놀러간다거나 하는 일도 벌어진다. 사실 제주에서 보내는 나날 중 이 시간이 내겐 가장 의미가 있다. 익숙한 우물에 깊게 빠지려 할 때쯤 다시금 세상은 정말이지 넓고 잘 사는 방법도 여러가지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 준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또 준비하고 있는 다른 공간도 잠깐 엿보고 왔다.

다음날은 버스를 타고 조금 나가 구좌읍 행원리에 갔다. 어떤 카페를 갈까 하고 찾아보다가 카이막을 판다는 카페가 있다는 게 아닌가. 계속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갈 만한 가치가 있어보였다.

인테리어도 너무나 깔끔하게 되어있었고, 북유럽 가구들만을 들여놨다고 하시던데 그 만듦새에도 깜짝 놀라고 즐거웠다.

소소한 소품 배치도 너무 귀여웠고

카이막과 라떼아트 또한 기가 막혔다. 제주에서 먹는 카이막이 이 정도라면 본토 카이막은 어떨지 오히려 더 궁금해졌다.

어떤 교회를 개조해서 만든 곳이라 외관도 특색있고 인상깊었다.

가기 전날에 옷을 챙기려고 날씨 예보를 봤는데 이 날 최고기온이 18도라고 해서 조금 오바스럽지만 반팔티까지 챙겨갔었다. 외투는 봄 가을에 어울릴법한 자켓 하나만을 들고 갔다. 그런데 웬걸, 찬 바람이 욕 나올 정도로 불어 살을 에는 듯 했다. 제대로 걷기도 힘든 바람에 온 몸이 서늘하고 기가 빠졌다. 해가 좀 드나 싶었지만 바람은 여지없었다.

파도도 꽤 높았다.

살랑대는 바람과 햇살을 맞으며 이런 풍경을 봤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셔터만 누르고 얼른 갈 길을 재촉하기에 바빴다

추위에 떨다 들어간 돈가스집은 가격은 좀 있긴 했지만 충분히 따뜻하고 좋은 식사를 내 주었다

아직 잔뜩 움츠린 동백 꽃봉오리들. 2월 말이면 다 피고 지었어도 이상할 날짜가 아닌데..

그래도 바람이 잔뜩 불더니 구름은 좀 걷히고 이런 풍경도 보여주었다.

다음 날.. 거짓말같이 잦아든 바람과 맑아진 하늘.

익숙한 곳들을 뒤로 하고 현생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곧 다시 올게.

날씨만 아니었다면 참 괜찮은 휴식이었으련만.. 그래도 괜찮다. 많은 것을 바라고 오는 것이 아니니 많은 것을 가지고 가지 않아도 아쉽지 않다. 또 더욱 즐거울 다음이 기다려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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