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부터 뻔질나게 제주도를 왔다갔다 하면서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결항이나 회항같은 일을 겪은 적이 없었다. 강풍이나 폭설로 공항에 몇만 명의 발이 묶였다는 뉴스를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제주지만 어쨌든 지금까지는 운이 좋다고 해야 할 지. 이번에도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한 채로 비행기에 올랐다. 서울에는 벚꽃이 핀 걸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왔고 날씨가 흐렸지만, 그리고 물론 제주 또한 날씨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설마 공항에 내리지도 못 하는 일이 생길까.

얇은 책 한 권을 비행 내내 집중해서 끝내버리고 비행기는 곧 제주공항 활주로에 어프로치를 시작했다. 창 밖으로 시내가 점점 가까워지고 이제 곧 내리겠구나 생각하던 찰나 지금까지 제주에 착륙하면서 경험하지 못 한 수준의 동체 흔들림을 느끼기 시작했다.

뭔가 좀 이상한데 라는 생각이 든 순간, 아마 지상으로부터 고도가 2-300m 쯤 되었을까. 롯데월드타워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서울시내의 깨알같은 모습보단 훨씬 건물이며 도로의 크기가 크게 느껴졌으니 적어도 그 높이의 절반 정도는 되었을 거다. 그 때 꼭 롤러코스터가 급출발을 하는 것 마냥 몸과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엄청난 가속도로 동체가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흡사 "나의 진가를 보여주지" 라고 외치는 듯 엔진 추력을 풀파워로 내는 순간 내 몸에 전해지는 에너지는 불과 5초 전과의 그것과는 너무나도 대비되었다. 어프로치하며 하강할 때의 비행기는 마치 활강하는 무동력 글라이더처럼 아무런 힘도 쓰지 않는게 아닐까 생각될 만큼. 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고어라운드구나.

단거리든 장거리든 비행기를 그래도 꽤 타본 내 입장에서도 처음 겪는 고어라운드였다. 신기하기도 하고, 오싹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아니 사실은 일부러 그 어떤 감각도 자각하지 않으려 했다. 가속도도 받음각도 거의 최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치솟는 비행기 속에서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공포를 "에이 이런 일이야 지금도 세계에서 하루에 몇십 번씩은 일어나고 있을텐데, 침착하자" 라는 이성으로 덮어버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냥 아무 생각 말고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집중을 하다 보면 다시 비행기는 안정을 찾을거야... 그리고 다시 공중에서 선회를 좀 하다가 어프로치 시도를 하겠지. 라는 생각과 함께 점프시트에 앉은 승무원의 얼굴과 오버헤드빈과 허공 어딘가를 번갈아 쳐다보며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어느 정도 고도에 올라오자 비행기는 미친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주 지독한 난기류를 만났는지,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으로도 숨겨지지 않는 달달달 소리와 함께 자이로드롭에 탄 것처럼 순간적으로 동체가 훅 내려앉기까지 했다. 벨트를 제대로 매지 않은 사람들은 자리에서 공중으로 약간 점프를 했고, 공포에 질린 승객들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일순간 기내를 가득 채웠다. 옆자리 커플은 한 손으로는 서로의 손을, 나머지 손으로는 팔걸이를 부여잡고 기도를 하는 듯 했고, 호들갑을 떨기 싫은 나조차도 손에 땀이 나는 반사적인 반응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마 한 1~2분 정도 그런 상태로 있다가 동체가 안정을 되찾은 후, 기내 방송으로 기상 악화로 인해 김포공항으로 회항한다는 기장의 안내가 들려왔다. 그래... 사람 죽는 것보다야 낫지 싶으면서도 난생 처음 겪는 고어라운드에 회항까지 연타로 맞으니 속상하고 아쉬운 마음은 도저히 삼켜지지가 않았다. 책 읽는다고 유튜브 영상도 오프라인 저장 안 해가지고 왔는데... 그냥 망연자실해 하며 기내 면세점 책자나 뒤적이다가 김포에 심히 안정적으로 착륙을 했다. 한국 국내선 비행기에서 착륙 후 승객 박수가 나온 건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이미 김포에 내린 시각이 오후 6시가 넘은 터이고 한두 시간이 지났다고 기상이 확 좋아지지도 않을 거라 대체편이 있을 거란 기대는 거의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마음에 누구보다도 빨리 도착장을 빠져나와 항공사 데스크 앞으로 갔다. 하지만 우리 비행기는 이륙해서 제주공항 상공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케이스고 이미 그 뒤에 출발하는 편들은 이륙하기도 전에 결항이 나서 데스크 앞은 그 결항편 승객들로 이미 꽉 차 있었다. 밀려드는 사람들을 거기 있는 직원들로는 대응하기도 힘들어서 직원 얼굴을 보는 것조차 힘든 일이었다.

그냥 여행을 포기하고 집에 가야 하나, 아니면 안내를 받고 내일 대체편이라도 잡아서 가야 하나, 혹시나 오늘 늦게라도 대체편을 띄우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공항을 배회하던 찰나였다. 항공사 카운터 근처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살펴보니 어떤 백발의 할저씨가 직원 하나를 붙잡고 악을 쓰고 있었다.

뭐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옆으로 가서 상황을 지켜보다 녹음기를 꺼내 녹음을 시작했다. 차마 영상을 대놓고 찍기에는 좀 겁이 나서... 그런데 단순히 항의 정도 하는 줄 알았건만 그 할저씨 입에서 개새끼, 씨발새끼, 니 애비 같은 단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세상 살며 말려들면 피곤할 것 같은 일에 괜히 발 걸치지 말자 다짐한 적도 있었건만, 나한테 하는 욕도 아닌데 갑자기 머리 끝까지 열이 받아서 그 옆으로 가 둘 사이를 가로막으며 "어르신 그만하세요" 하며 말렸다.

할저씨는 밀려나면서도 눈으로 계속 그 직원을 응시하며 뭐라뭐라 말을 하다가, 이젠 나를 쳐다보면서 "넌 뭐야? 뭔데 끼어들어?" 라고 반말을 시전했다. 그러면서도 직원에게 쌍시옷 발음을 놓지 못하며 차마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폭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나도 왼팔의 흑염소가 깨어났는지 "그만하세요!" 라고 사자후를 지르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큰 데시벨로 소리를 지른 적이 대체 언제였는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가만히 줄을 서서 취소나 변경을 기다리고 있던 승객들의 이목은 모두 우리에게로 집중되었다.

"어린노무 새끼가... 넌 뭔데 끼어드냔 말이다! 이 개새끼가... 니 애비한테나 그렇게 태클 걸어라" 라는 말을 듣자 나도 꼭지가 돌 뻔 했지만 실낱같은 이성을 붙잡고 "자꾸 그렇게 욕 하실거에요? 녹음 하겠습니다. 제가 제 아버지한테 태클을 왜 걸어요?" 라며 응수했다. 할저씨는 "너 유튜브냐 혹시?" 라는 이상한 말을 남기며 좀 흘겨보다 다시 직원에게 일방적으로 화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회항을 하면 했지 왜 착륙하다가 다시 그렇게 비행기를 올리냐, 착륙을 기장 마음대로 그렇게 판단해도 되느냐, 기장이 살인미수로 잡혀가야 한다, 처럼 나같은 세미 항덕으로서 그냥 넘길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기도 하고. 내가 아산병원에서 치료받는 환자고 제주도민이며 비행기도 수없이 타 봤는데 이런 일은 처음이다, 내가 건설업을 하는데 건물 짓다가 사고가 나면 시공사가 전부 책임지는데 이거에 대해선 누가 책임질거냐, 자기가 환자여서 한달 반동안 술을 안 먹다가 이 일 때문에 화가 나서 착륙하고 1층에서 소주 한병 때리고 지금 올라와서 항의하는 거다, 같은 개저씨의 TMI 대잔치 한풀이가 계속되었다. 술 취한 개저들의 특기인 했던 소리 하고 또 하기 를 시전하면서... 

그 중에서도 압권이었던 장면은, 직원이 고어라운드는 타당한 조치였다는 판단에 대한 데이터를 보여주려고 단말기인지 휴대폰을 꺼내 보여주려고 하는데 그딴건 필요없다고 말하며 그 손을 탁 치는 물리적 폭력을 쓰는 부분, 그리고 니네가 안전 관리를 그따구로 하니까 작년에 그렇게 사고가 나지 운운하는 패륜적인 언행을 내뱉은 부분이었다. 아무리 인간성이 파탄났어도 백몇십명이 죽은 참사를 가지고 자기에 화풀이에 그 분들을 욕보인다는 사실이 정말 참기가 힘들었다. 직원분도 "어 폭력은 안됩니다 손님", "말씀이 좀 심하십니다 손님" 정도로 맞받아치긴 했고, 나도 옆에서 혀를 차며 나지막이 욕을 내뱉었다. 정말 직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그리고 우리나라같이 이런 진상 고객들에게 직원이나 시큐리티가 단호히 대처하지 못 하는 답답한 환경에서 그런 상황에 머리만 조아리며 넘길까봐 바로 옆에서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술취한 환자 개저씨는 하여간에 자기는 금전적인 보상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게이트에 전 직원이 도열해서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해야 했다고 하며 꼰대스러운 쓰레기 발언들을 조금 더 내뱉다가 제 풀에 못 이기고 자리를 벗어났다.

직원분은 그 개저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나에게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90도 인사를 하며 악수까지 청하셨다. 그 개저와 내가 같은 비행기를 탔다는 걸 중간에 알고는 내가 대화 중에 끼어들어서 "솔직히 나도 같은 비행기 탔는데 오바하지 마라, 고어라운드는 흔히 있는 일이고 기장 마음대로 착륙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관제탑에서 콜사인 떨어져야 기장도 착륙 시도를 하는거지 살인미수같은 개소리는 하지 마라" 정도 말을 얹었었는데 그것 때문에 그러셨는지 혹시 나에게 항공사에서 근무하냐고까지 여쭤보셨다. 손사래를 치며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걱정이 되어서 옆에 있었다, 괜히 오지랖 부린 건 아닌가 싶은데 이상한 사람 때문에 마음 아프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도 차근히 기내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드리고, 혹시 대체편 계획은 없냐 여쭤보기도 하며 스몰톡을 좀 하다가 자리를 빠져나왔다. 사실 직원분도 이런 일이 한 두번이 아니라는 것처럼 별로 크게 기 죽는 것도 없이 잘 대응하고 계셔서 진짜 오지랖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나 같으면 본인과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 손님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알량한 뿌듯함을 가지고 일단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어지러운 시간을 보내고 일단 나와서 좀 생각해 보니 괜히 나도 개저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개저씨로의 변태에 필수요소인 어디서 무시받고 홀대당한 경험에서 비롯된 부족한 자존감을 으레 그렇듯 서비스업종 직원에게서 그릇된 방법으로 채우고자 하는 욕망이 컸을텐데, 거기에 그냥 오구오구 해 주면서 나도 같은 비행기 탔는데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나도 화가 나서 찾아봤는데 여기선 규정대로 한 거라서 따질 방법이 없더라, 마음 넓고 훌륭하신 선생님이 참으셔라, 몸도 안 좋으시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화 내시면 혈압 오르고 쓰러지신다 건강 생각하셔라, 이렇게 할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쌍소리에 열받아서 나도 되받아치면 그냥 똑같은 수준의 인간이 되는 건데 하는 그런 생각. 아직 진짜 어른이 되려면 멀었나 싶은 생각.

아마 방금의 상황을 어떤 해결해야 하는 문제의 일종으로 생각한다면, 그 문제를 푸는 제일 좋은 방법이 과연 나의 아까처럼 같이 기싸움 하면서 논리로 납득시키는 방식이었을까? 그건 아닌 것 같다는 맥락에서다. 티비에 나오는 어떤 연예인이나, 내 주변의 유난히 넉살과 멘탈이 좋은 사람들이 몇 생각나면서 그런 사람들은 정말로 내가 담배를 피우며 생각한 시나리오처럼 그 개저의 마음을 사르르 녹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망상을 했다. 그러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 될 수는 없을거야, 그 상황에서 외면하지 않고 오지랖을 부린 것 만으로도 나는 나란 인간에게 만족한다 생각하며 담배를 끄고 공항을 나섰다.

아무튼 여행은 취소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사건 다음 날 오전 대체편을 잡아서 지금 제주 바다를 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매우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 두 개가 동시에 터졌던 날을 짧게나마 기록해 둔다.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잃어버리고 잊어버리기 쉬운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물음을, 역설적이게도 아주 짧고 희귀하고 비일상적인 사건들 속에서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런 순간들이 힘들고도 소중해서 요즘 유난히 집구석에 가만히 박혀있지 못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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