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있는 분야(딥러닝)를 좀 공부할까 싶어 관련된 그룹 2개에 가입하고 페이지 몇 개도 팔로우를 눌러놓았다. 그랬더니 내 피드는 온통 딥러닝 얘기로 가득 차 버렸다. 심도 있게 공부를 한 것은 아니라 내가 이해를 못하는 글이 올라오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결국엔 딥러닝 공부를 한다기보다 그냥 '세상엔 정말 똑똑하고 딥러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구나' 라는 것을 느끼고 자괴감에 빠질 때가 많아지게 되었다. 자주 그 그룹들에 글을 올리고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저 사람들 머리는 자나깨나 딥러닝으로 꽉 차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나도 딥러닝 공부를 하면 다행이지만 그 사람들과는 달리 요즘 내 머리를 지배하는 것은 '언제 블로그에 여행 글을 다 쓰고 책 출간을 시도라도 해 볼까' 인데 그것마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전자는 그냥 쓰기만 하면 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내가 글 쓰는 일을 꽤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딥러닝 공부는 글 쓸 생각에 빠져서 안 하고 글 쓰는 것은 귀찮아서 안 한다. 난 뭘 해야 할까? 뭘 해야 귀찮음과 권태를 느끼지 않고 재미있게 할 수 있을까?

라는 글을 얼마 전에 페이스북에 쓴 적이 있다. 요즘 잠시 자괴감과 권태감을 느끼고 공부를 소홀히 하던 차였는데, "미치지 못해 죄송합니다" 라는 한 에세이 (https://univ20.com/63889) 를 읽고서 조금의 위안과 힌트를 얻었다.

그리고 다음 날 역시나 딥러닝 이야기로 가득한 피드를 둘러보고 있었다. 저 그룹들에서 정말 활발하게 활동하는 분이 한 분 있다 (이하 T씨). T씨는 요즘 한국에서 딥러닝을 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누구나 한 번 쯤은 들어봤을 만큼 유명한 분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T씨는 딥러닝 그룹에 글을 쓰셨다. 매번 그냥 읽고 지나가다 오늘은 괜한 호기심에 처음으로 T씨의 타임라인에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T씨의 피드 중 가장 최근에 올라온 글을 보고 잠시 충격을 받았다. 타인의 글이기에 복사해 올 수는 없지만, 요지는 대충 다음과 같았다.

매일 딥러닝 분야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훌륭한 논문들이 나오는데, 나의 연구는 잘 되지 않는다. 데이터는 형편없고 삽질은 거듭되어 슬럼프에 빠진다.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괄목할 만한 성과는 없었고, 학계의 발전을 따라잡기엔 정신적으로 지쳐간다. 오히려 학계에 좋은 논문이 얼마 나오지 않던 때가 삶의 질이 더 좋았던 것 같다.

나는 T씨가 연구자로서 얼마나 많은 업적을 이루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T씨는 유튜브나 페이스북 등 많은 채널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딥러닝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돕고 있고, 꽤 커진 그룹의 운영진까지 맡으시며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다. 자연스레 나는 무의식적으로 T씨를 '이 쪽 필드에서 그래도 성공하신 분, 적어도 한국에선 많이 유명하신 분, 정말 열정이 있으신 분, 닮고 싶은 분'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분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다. 작은 고민도 아니고, 자신의 본업인 연구자로서의 일이 오랜 시간 잘 풀리지 않아 고민하고 계셨다. 그 분의 글에는 어떠한 기만도 없이, 거대하고 높은 학계의 파도 앞에서 순수하게 무력한 기운을 느끼는 한 연구자의 마음이 절실히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처음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쓰며 생각한 마음과 거의 비슷했다. 한국 딥러닝 계의 선봉장 격이 아닐까 생각했던 분도 나와 비슷한 무력감을 느낀다는 말이었다. 

T씨가 딥러닝 강의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딥러닝 그룹에서 활발히 활동한다고 해서, 그가 또한 훌륭한 논문을 슥슥 써 내는 연구자일 것이라고 시나브로 단정지은 나의 생각 자체가 틀렸을 수 있다. 하지만 초보자의 입장에서 T씨가 매우 고수처럼 보였던 것은 사실이고, 그 고수가 나같은 초보자와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기분을 느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위안을 느꼈다. 학문이란 오르고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같다고. 문득 올려다 보았을 때 저만치 앞서가는 사람도 나와 같이 끝이 보이지 않아 헤매고 있다고. 그래서 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정상까지 등반하는 것' 대신에 '항상 어제의 나보다 한 발짝 더 가야 한다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미치지 못해 죄송하지" 않아도 된다고.

누구나 막막한 것이 있다. 그러기에 막막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잡지 '대학내일'에 내 글이 실리다  (0) 2017.06.28
꾸준함  (0) 2017.06.24
청문회  (0) 2016.12.23
12월  (0) 2016.12.04
목표가 있다는 것  (0) 2016.11.06

결국 파리를 떠나는 날 당일에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를 가야 했다. 파리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버스는 밤 9시 30분에 떠나는 야간버스였기 때문에 시간은 충분했다.

기차는 북역에서 타야 했다. 북쪽으로 가는 기차를 한번 타고 다시 더 작은 기차로 갈아타야 했는데, 첫 번째 탄 기차는 외곽 사람들이 통근 목적으로 좀 타고 다니는 것 같았지만 두 번째 작은 기차는 정말이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월요일 아침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노선 자체가 사람이 없는 한적한 마을만 지나다녔다. 칸 하나를 전세내고 창 밖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갔다.

관광과는 거리가 먼, 이런 소박하고 딱히 멋 없는 풍경들이 사랑스러울 때가 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도착했더니 역시나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지도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관광 안내 센터를 찾아갔더니 하필 오늘 문도 안 열었다. 문을 연 가게들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마 현지 주민들은 거의 한 명도 못 본 것 같고, 관광객들만 이따금씩 눈에 띌 뿐이었다. 월요일 아침이라 그런거라 위안삼고 마을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고흐가 살기 직전에 머물며 수 많은 걸작을 그려낸 마을이다. 고흐는 이 마을에 있는 많은 건물들도 그려서 작품으로 남겼는데, 이제는 이렇게 건물 앞에 고흐가 그린 그림을 세워 두었다. 건물과 그림을 가만히 번갈아 보고 있자니, 어떻게 이런 건물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그의 불안했던 정서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햇살이 정말로 따사로웠다. 오늘 파리를 떠나는 날이었기에 숙소의 짐을 다 정리하고 나왔는데, 어제 빨아놓은 수건을 침대에 걸어 하룻밤 사이 말렸는데도 마르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 수건을 비닐봉지에 싸서 가방에 넣고 다니면 다시 열었을 때 기분이 심히 불쾌해지는 썩은내가 날 것이 분명하기에, 그 수건을 여기 올 때 들고 나왔었다. 이 교회 앞의 벤치에서 좀 쉴 겸 수건을 벤치에 펴놓고 그늘에서 한 시간쯤 여유부리고 나니 수건이 빠싹 말라 있었다. 뿌듯했다.

저 그림 표지판에 써 있는 번호가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작품 번호같긴 한데, 지도도 없고 힘도 빠지고 그래서 고흐가 권총 자살로 생을 끝낸 들판과 그의 묘지로 가 보기로 했다.

숲길을 5분정도 걷자 나무가 사라지고 드넓은 들판과 하늘이 나타났다. 한 쪽에는 농기구가 널려있고 거대한 스프링클러가 내 키의 몇 배만한 높이로 물을 뿌려대고 있었다. 위대한 화가가 그의 생의 마지막 순간에 서 있었던 이 들판은 이제 그냥 어디에나 있는 농지나 다름없었다. 서울 촌놈이라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 밀밭이 아닐까 싶었다. 들판의 초입에 서 있었던 저 그림 표지판 하나만이, 이 들판이 한 때는 고흐가 즐겨 찾던 곳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들판을 찬찬히 둘러보며, 대체 고흐가 자살할 때에 서 있었던 곳은 어디일까 그려보며, 혼자만의 시계를 돌려 고흐와 같이 있는 것 같은 묘한 감정을 느끼려고 했다.

옆에는 공동묘지가 있고, 이 곳에 고흐와 그의 동생도 안장되어 있다. 보다시피 다른 묘의 비석들은 내 가슴팍 정도도 넘을 만큼 커다란 것들이었다. 하지만 고흐와 그의 동생의 묘는 특이하리만치 소박했다. 나는 여기에 오기 전 미리 알았으니 망정이지, 만약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냥 못 본 채 지나가도 모를만큼 작았다. 무언가 울타리가 쳐져있지도 않고, 양 옆의 다른 묘비 사이에 작게 자리잡고 있다. 고흐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 마을에 들른 오늘만큼은 고흐에 대한 것들을 보고 느꼈기 때문에 묘지를 보고는 괜시리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잠시 묵념을 하고 돌아갔다.

그렇게 다시 마을로 내려와 파리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다.

고흐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러야 할 곳인 듯 하다.


----------

7/14 144.76€ (방값 137€)
7/15 13.1€
7/16 27.3€
7/17 31.04

7/18 16.85


'여행 > 2016 유라시아 일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D+66] 바르셀로나 여행 2  (0) 2017.05.07
[D+66] 바르셀로나 여행 1  (0) 2017.05.06
[D+64] 파리 여행 4  (0) 2017.02.26
[D+64] 파리 여행 3  (0) 2017.01.13
[D+64] 파리 여행 2  (1) 2016.09.1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