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르스트행 곤돌라의 첫 번째 정거장이었던 보어트를 지나 두 번째 정거장인 슈렉펠트(Schreckfeld)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이미 길은 거의 평평할 정도로 완만해져서 주변을 둘러보며 힘을 빼고 느긋하게 걷고 있었는데 어딘가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소떼가 풀을 뜯어먹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그게 말로만 듣던 워낭소리였다니. 이미 깎아지른 절벽과 만년설, 초록빛 들판과 들꽃만으로 마음이 풍성해진 찰나였다. 그 와중에 예상치 못한 소의 갑툭튀는 이 풍경을 더욱 비현실적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마치 공부만 잘 하는 줄 알았던 애가 여자한테 능숙하게 작업거는 모습을 봤을 때 느낌이랄까.


아무튼 슈렉펠트까지 지나고 나니 고도상으로는 피르스트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만 길이 완만하고 꽤 돌아가는 경로여서 그 후로도 꽤 많이 걸었다. 주변은 둥글게 움푹 파인 듯 한 모습이어서 마치 백록담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하늘 위로는 피르스트 플라이어가 지나갔다. 어차피 돈 없어서 못타겠지 생각하며 굴비를 바라보는 자린고비마냥 한참 쳐다보았다. 걸어서 1시간 걸리는 길을 플라이어로는 1분만에 주파한다.

드디어 3시간이 약간 안되는 시간만에 피르스트에 도착했다. '대견하다 이 미친놈아..' 라고 나에게 칭찬을 한번 해 주고 땀에 뻘뻘 젖은 채로 털썩 앉았다. 곤돌라에서 이제 막 내린 사람들은 기운이 넘쳐 보였다.

한숨 돌리고 시계를 보니 벌써 세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비싼 건 안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트로티바이크 만큼은 꼭 타고 와야 된다고 열이면 열 모두 강추를 하길래 그건 한번 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쉬면서 트로티바이크에 대해 검색을 좀 하고 있었는데 마감 시간이 네시 반 경이라는 글을 보았다. 트로티바이크는 첫 번째 정거장인 보어트에서 타는데, 다시 보어트까지 걸어서 돌아가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한시간이 넘게 걸린다. 마감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한시간 반.

피르스트에서 필수로 해야 한다는 바흐알프제까지의 하이킹을 하기엔 도저히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바흐알프제 사진에서 본 호수에 비친 산의 모습이 너무 멋있어서 꼭 가보고 싶었는데 아쉽기 짝이 없었다. 숙소에서 두 시간만 일찍 출발했다면 어땠을까.. 나의 게으름이 그 순간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비라도 올 듯 구름이 짙게 끼었기에 '그래 가봤자 흐려서 사진만큼 그렇게 예쁘지도 않을거야..' 라고 위로하며 그저 피르스트 주변만 잠깐 둘러보았다.


저 Cliff Walking도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지만 시간관계상 패스했다. 무서워서 패스한 게 아..아니다..!


똑같은 길을 따라 다시 내려갔지만 풍경은 그새 바뀌어 있었다. 어느새 구름이 거의 내 눈높이에 걸려 있었다.

안 그래도 바흐알프제 하이킹도 못한 마당에 트로티바이크까지 못 타고 돌아간다면 완전 헛수고라는 생각에 속도를 올렸다. 보통 구글 맵의 예상시간은 정말 정확해서 실제와 오차가 나더라도 기껏해야 2~3분 남짓인데, 조급한 마음에 얼마나 속도를 올려가며 걸었는지 예상 시간보다 20분이나 보어트에 빨리 도착했다.

가격은 19프랑, 곤돌라보다야 훨씬 쌌지만 고작 액티비티에 쓰기에는 큰 돈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추천을 받았으니 눈을 질끈 감고 카드를 내밀었다. 트로티바이크는 바퀴가 큰 킥보드같이 생겼다. 페달을 굴릴 필요가 없고, 알아서 경사진 길을 내려가며 브레이크로 속도만 조절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정말 빨랐다. 천천히 느긋하게 풍경도 감상하며 내려갈 수 있었지만 이 완벽한 경사로를 질주하는 속도감이 정말 짜릿했다. 비포장도로에서의 불안한 덜컹거림까지 온 몸으로 느끼면서 사람들을 제치고 질주했다.

다른 블로그에서 트로티바이크를 타고 내려오다 쉬면서 사진도 찍고 했더니 총 한시간이 넘게 걸렸다는 글을 봤는데, 나는 1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속도를 거의 줄이지도 않고 비포장도로와 커브길을 신나게 달린 덕이었다. 19프랑이 전혀 아깝지 않았고, 기대를 많이 했는데 그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솔직히 이 트로티바이크 때문에 나중에 그린델발트를 한번 더 가고 싶어질 지경이다.

그 날 저녁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마지막 날인 다음 날은 하루종일 비가 왔다. 전날 피르스트 하이킹 때문에 너무 무리했기도 하고 하루종일 숙소에서 빈둥대다 오늘은 제대로 된 저녁을 만들어 먹어보기로 했다. 이 스위스의 대명리조트에서는 매일 저녁 한국인들의 천하제일 요리대회가 열린다. 주방에서 동시에 네 팀 정도가 요리를 할 수 있는데, 삼겹살부터 시작해서 별의 별 요리를 만들어 먹는다.

다들 여럿이서 요리를 하는데 나만 혼자 주방에 자리를 잡았다. 옆에서 요리하는 팀의 대화를 살짝 엿들으니 서로 존댓말을 하는 걸로 보아 따로 왔는데 동행을 하는게 아닌가 싶었다. 혼자 온 사람들도 그렇게들 많이 무리를 지어 다녔지만 나는 꿋꿋하게 재료를 풀어놓고 혼자 요리를 시작했다. 소고기 스테이크와 치즈를 넣은 양송이 구이, 그리고 토마토 스파게티를 할 생각이었다.

열심히 혼자 팬 3개를 써가며 요리를 하고 있던 찰나 어떤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혼자 왔냐면서 요리를 되게 잘 한다고 칭찬을 해 주었다. 사실 나도 요리를 하던 사람도 아니고, 오늘은 메뉴가 많아서 신경쓸 게 한 두가지가 아니라 너무 정신이 없었는데 그래서 허둥대는 걸 요리를 잘 하는걸로 보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요리가 다 완성되어서 혼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아까 말을 걸었던 그 남자분이 오셔서 고추장삼겹살을 조금 덜어주셨다. 그리곤 혼자 드시는거면 같이 먹자고 제안을 했다. 친절함이 고마워 자리를 옮겼다. 알고 보니 대구에서 오신 부부였는데, 재밌게 얘기를 하면서 맥주와 다른 음식들, 과일도 얻어먹었다. 내 치즈 양송이 구이도 같이 나눠먹었는데 칭찬을 들어 기분이 좋았다. 혼자 저녁먹고 쓸쓸하게 지낼 뻔 했던 인터라켄에서의 마지막 밤이 그래도 그 대구 부부 덕분에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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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0 159.7fr (방값 118.5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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