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처음 밴드부에 들어간 지 10년이 지났다. 고등학교 때도 밴드부였고 지금도 밴드 동아리를 하고 있다. 스쿨 밴드가 카피하는 곡이나 연주 수준은 보통 거기서 거기긴 하다만 어쨌든 정말 오랜 취미 중 하나다.

어제는 합주가 있었다. 집에서 준비를 하고 나와 시간을 대충 계산을 해 보니 약속된 시작 시간보다 20분 정도 늦을 것 같았다. 늦는다고 얘기는 해야 하니 단톡방에 좀 늦을 것 같다고 메세지를 치려는 순간이었다. 내가 13학번이고 팀엔 모두 15학번, 17학번 등 후배들이었는데, 그 순간 부끄럽게도 '늦는다고 해도 애들이 나한테 막 뭐라 하지는 않겠지..? 좀 가볍게 말해도 되려나?'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갔다.

다행히 참 못된 생각이었다는 걸 금세 깨달았다. 내가 제일 후배이고 막내이던 시절, 09 10 11학번 선배들 사이에 껴서 연습하던 그 때를 떠올려 봤다. 그 때도 게으른 나는 가끔씩 늦을 때가 있었다. 그런 날이면 마치 카톡창 너머에 내가 납작 엎드리는 모습이 그려질 정도로 선배들에게 죄송해 어쩔 줄 몰라하곤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해서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며 성급히 악기를 들던 나의 모습이. 그 때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약속에 늦는다는 건 내가 어느 위치에 있건 잘못된 행동이고 상대방이 선배든 후배든 기분이 나쁠 만한 행동이다. 그런데 누구를 상대하느냐에 따라 내가 갖는 죄책감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것, 내 스스로에게 더 또는 덜 엄격해진다는 것, 상대방의 기분을 더 또는 덜 헤아린다는 것.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저께야 그런 생각이 잠깐 들긴 했어도 금방 스스로를 바로잡았지만, 이런 생각을 더욱 당연하게 그리고 더욱 자연스럽게 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얼마나 더 철이 들어야 하는가?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해 윗사람에게 사과할 때와 똑같은 감정과 언어로 아랫사람에게 사과하기 위해서는 내 인격이 얼마나 더 다듬어져야 하는가? (윗사람 아랫사람은 포괄적인 의미로 쓴 단어이고 동생, 후배들을 내 아랫사람이라 생각하는 건 전혀 아니지만)

정말이지 난 아직 모자란 사람이다. 형이 되고 선배가 되고, 훗날 사회에 나가서 누군가의 상사가 되고, 어쩌면 아버지가 되고, 그 무엇이 되더라도, 살아갈수록 점점 더 스스로를 낮추고 경계하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 흔히 '강약약강(강한 사람에게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 강한)' 이라고 하는 부류의 사람들을 정말 싫어하는 나지만, 그런 나도 '강약약강'이 되지 않기 위해선 무던한 노력과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이게 또 은근 보기보다 어려운 일임을 깨닫게 된다.


'잡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황  (0) 2018.07.22
대학원 면접 후기  (0) 2018.05.29
비트코인 투자에 대한 생각  (0) 2017.11.30
선한 마음만이 전부가 아니다  (0) 2017.10.22
아는 만큼 보인다: 최저임금에 대한 단상  (0) 2017.09.02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