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석 연휴에 오랜만에 친한 고등학교 동아리 선배들을 만났다. 흔히 '연트럴파크' 라 불리는 공원에서 돗자리를 깔고 앉아 맥주를 마시고 통기타를 치며 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한 선배의 페이스북 친구였던 고등학교 후배 K 마침 연트럴파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페이스북 댓글을 통해 얘기를 하다가 K가 잠시 인사를 하러 온다고 했다. 동아리 후배는 아니어서 우리 모두 한 번도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친하지도 않지만, 어쨌든 동문이니 잠깐 얼굴 보는 정도는 괜찮겠지 싶었다. (페이스북 친구였던 그 선배마저 K와는 초면이었다.)

K는 자기와 같이 있던 다른 친구 B를 데려왔다. B는 우리의 동문은 아니었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자기를 '평생 예술만 한 사람' 이라고 소개했다. 처음엔 그저 좀 독특하고 밝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대화를 나눌수록 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K와 B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때에도 어렵고 현학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즐겼으며, 웬만한 사람은 공감하기 힘든 유머 코드를 가지고 있었다. B는 신소재공학 박사과정 5년차인 동아리 선배 앞에서 "페이스북에서 봤다" 라는 말과 함께 '월가의 주목을 받는 혁신적인 바이오센서 기술' 에 대한 심도있는 토론을 하려고 했으며, 우리 모두에게 관심도 없는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강의를 하려고 했다.

여기까지는 그저 '학문을 좋아하는 특이한 사람이다' 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몇몇 행동들은 도저히 표정관리가 안 될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알아서 천천히 술을 마시던 우리에게 쉴 새 없이 건배를 제안했고, 초면인 사람들 앞에서 욕설을 섞어가며 대화를 했다. 한 선배가 잠시 전화를 받으러 자리를 비운 사이, 돗자리에 놓여 있던 그 선배의 담뱃갑에서 묻지도 않고 담배를 꺼내 피웠다. 핑거스타일 기타를 꽤 수준급으로 연주할 줄 아는 선배의 면전에 대고 박수로 박자를 세며 '어디 한번 해 봐' 라는 식으로 연주를 시키기도 했다.

우리 모두 어이가 없고 기분이 상해서 K와 B의 말에 대꾸를 잘 하지 않게 되었고, 자연스레 K와 B끼리만 대화를 하다가 새로운 동아리 선배가 합류하는 타이밍에 그들은 떠났다.


#2.

4학년 2학기를 다니고 있는, 이제 학교를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졸업반이지만 얼마 전에 국궁 동아리에 새로 들어가게 되었다. 꽤 오랜 시간 전부터 활 쏘는 것에 관심이 가기도 했고, 이 동아리는 졸업생의 활동이 활발한 데다가 학번 학년 제한없이 신입생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별 부담 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동아리에서는 주로 주말에 서울 곳곳에 있는 활터에 모여 활을 쏘는데, 아예 활을 만져보지도 못 한 사람이 처음부터 활터에서 쏘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때문에 주중에 신입생을 따로 모아서 학교 운동장이나 노천극장 같은 곳에서 수련을 하고, 경험이 좀 쌓이면 활터에 같이 갈 수 있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교육 담당인 졸업생 선배와 동아리 회장, 그리고 신입생들만이 모인 카톡 대화방에 초대받게 되었다.

그 대화방에는 특이하게 동아리 신입생인데도 '아재' 느낌이 꽤 나는 사람(이하 P)이 한 명 있었다. 프로필 사진도 그랬고 대화명도 그래서 의아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중에 졸업생 선배와 회장의 대화로부터 P가 현재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 나이가 꽤 많은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기하긴 했지만 대화방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고 실제로 얼굴을 본 것도 아니어서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흘러 P를 실제로 볼 기회가 생겼다. 동아리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한다고 해서 갔는데, P도 환영회에 온 것이었다. 내 생각보다 꽤 나이가 많았다. 소개를 들어보니 한양대 86학번이며 사회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셨다. 86학번이라니, 우리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5년 가까이 학교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 대선배를 본 것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뭔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학교 모습 얘기라던지, 그런 재미있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P는 환영회 이후 동아리에서 강제 탈퇴되었다. 너무 많은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 맥주를 먹는 사람들에게 "왜 나만 소주를 먹고 있나" 하며 은근한 눈치를 주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나이가 많긴 하지만 엄연한 동아리 신입생임에도 불구하고 회장 노릇을 하려고 했으며, 동의도 없이 자신의 핸드폰으로 신입생들의 독사진을 각각 찍고 신입생 카톡방에 올려버렸다. 여자 신입생들에게는 어디에 사냐고 집요하게 물었으며, "성동구에 살았으면 하고 기대했는데.." 라는 대체 의도를 알 수 없는 소름끼치는 말까지 남겼다. 1차가 끝나고 약속이 있어 가 봐야 한다는 여자 신입생의 팔목을 잡으며 2차도 같이 가자고 하고, 어떤 학생에게는 자기를 아빠라고 부르라는 말까지 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신입생 중에서도 나같이 학번이 좀 있는 친구들의 경우에는 적절히 답변을 피하거나 무시했지만, 올해 학교에 입학한 어느 친구는 그런 상황에 대처하는 게 좀 미숙했는지 애써 다 받아주는 모양이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다 미안해 질 정도로 추태를 부리는 P를 앞으로는 대체 어떻게 봐야 할 지 한숨만 나왔지만, 다행히도 동아리 차원에서 잘 처리한 덕분에 P를 다시 만날 일은 없게 되었다.


#3.

더불어민주당의 예비 대선후보였던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기세가 무섭게 올라오던 때에, 그의 지지율 상승세를 꺾어버린 해프닝이 하나 있었다. 바로 '선한 의지 발언' 이었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그 분들도 선한 의지로 없는 사람들과 국민을 위해서 좋은 정치 하시려고 했습니다."

이 발언으로 그는 일순간 이명박과 박근혜의 편을 들어주는 사람으로 몰렸고, 한번 상승동력을 잃은 지지율은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안희정의 저 발언이 어떤 의미로 한 말이었는지 이해가 된다. 이명박과 박근혜가 했던 일이 궁극적으로 옳냐 그르냐는 저 발언과는 관계가 없다. 선한 의지로 한 일이 누구에게나 좋고 선하고 옳은 일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국의 대통령까지 된 사람이, '난 나라를 망하게 할 거야!' 혹은 '난 국민을 고통스럽게 할 거야!' 라는 악마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민과 나라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이명박과 박근혜는 각자의 생각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을 뿐이다. 의도와 목적은 같아도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K와 B, 그리고 P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벌인 행동들만 보면 원래 본성이 나쁘고 이상한 사람들처럼 보일 수 있지만, 막상 또 무작정 그런 식으로 비난만 할 수는 없었다. B는 우리를 만나서 정말 행복해하며 자기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게 정말 재미있다고 말했다. P의 프로필 사진에는 '한 번 사는 인생, 재미있게 살자'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저 사람들과 함께 있던 나는 분명 불쾌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기 위한 의도로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왜 즐거움을 추구한다고 말하는 그들만 즐거웠고 다른 사람들은 불쾌했을까? 아마도 '내가 이런 행동을 한다면 상대방의 기분은 어떨까?' 혹은 '상대방의 이런 반응이 어떤 의미일까?' 라는 생각을 한 번쯤 해 보게 만드는 감수성이 그들은 조금 부족했기 때문이리라.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남도 좋아할 것이고,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남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내가 지금 즐거우면 남도 지금 즐거울 것이라는 자기중심성에 아직도 강하게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마다 불쾌함과 편안함을 느끼는 정도의 경계선이 다 다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처음부터 편하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물론 굉장히 힘든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남이 불쾌하든 말든 개뿔 신경도 쓰지 않고 내가 하고싶은 대로 살겠다는 주의가 아니라면, 그 선을 지켜가려는 노력은 게을리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처음 보는 사람의 선이 어디에 그려져 있는지 단번에 알아낼 수 없다면, 적어도 그 선이 어디에 있는지 조심스럽게 찾아가는 방법을 배워가야만 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의도, 선한 마음을 갖는 것 만이 전부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선한 마음이 남들에게도 선하게 비추어질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해보는 습관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4.

너는 그래서 누구한테든 좋은 사람이냐? 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나도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 만약 내가 완벽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구한테 훈수를 둘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다. 남의 인생은 말 그대로 남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냥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최대한 거리를 두는 것이다.

내가 불쾌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남이 내 선을 지키게 만들 수는 없으니, 그럴 때 대신 쓰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인가보다 하는 것이다. 남이 오로지 자기에게만 통하는 방식으로 나를 대한다면, 나는 그걸 내 방식으로 이해하길 포기하는 것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는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사람이란 게 얼마나 불완전하고 이기적인 존재인가에 대한 생각만 들 뿐 남을 원망하는 마음은 조금 사그라들더라.

물론 내 방법이 옳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언제나 저렇게 한다는 것도 아니다. 의도 자체가 불량하면 그건 그냥 나쁜 새끼다. 그리고 의도에 상관 없이 자칫 성희롱, 성추행으로 비춰질 수 있는 P의 몇몇 행동들은 쌍욕을 먹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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