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카곶에서 리스본으로 돌아오는 길에, 카스카이스 역에서 잠깐 내렸다. 역 주변을 잠깐 돌아보았는데 여기는 해수욕을 즐기는 휴양지 같은 느낌이었다. 나와는 전혀 어울리는 곳도 아니었고, 내가 그 곳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다시 기차에 올라서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저녁으로 스시 뷔페에 갔다. 전날 갔던 스시집은 메뉴판에서 스시를 고르면 그걸 한 접시씩 갖다 주는 식이었는데, 여기는 한국의 뷔페 식당처럼 내가 계속 골라서 먹는 식이었다.


다음날 점심에 그 스시 뷔페에 또 갔다. 리스본에서 지내는 3일 내내 스시를 먹은 것이다. 지난 세 달 동안 밥을 못 먹은 한풀이를 하는 듯 계속 미친듯이 밥이 먹고 싶었다. 런치 가격이라서 어제보다 싸게 세 접시를 해치우고 오늘은 벨렘 지구를 가 보기로 했다.


리스본 구시가에는 언덕과 오르막길이 많다. 사진에서 보듯이 경사가 매우 가파르지만 저질 체력의 여행자도 걱정할 필요 없다. 골목 구석구석을 작고 귀여운 트램이 누비고 다니기 때문이다. 트램 외벽에는 온갖 그래피티가 칠해져 있는 한편, 내부는 몇 십년 전 모습 그대로이다. 느린 트램을 타고서 칠이 벗겨진 낡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칠 때면 꼭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무조건 모든 것이 낡기만 한 것은 아니다. 베란다에 걸린 포르투갈 국기와 노랗고 파랗게 새로 칠한 건물들은 오랜 세월 사이에서 나름 세련된 포인트가 되었다.

벨렘 지구는 리스본 도심에서 걸어서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다. 걸어다니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보통은 벨렘 지구에 갈 땐 열차나 버스를 타고 갈 것이다. 나는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뚜벅이의 마지막 오기나 도전같은 건 아니다. 그냥 많이 걷다 보니 걷는게 좋아졌다.


리스본 중심지를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거대한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름은 4월 25일 다리. 1974년 4월 25일에 일어난 포르투갈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미국의 금문교와 정말 비슷하게 생겨서 좀 찾아보니, 미국 건설회사에서 시공한 것은 맞지만 금문교를 만든 회사가 시공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햇살이 정말 따가우리만큼 밝게 비쳤다. 그래서 그런지 바다만큼 넓은 강은 원래 수질보다 더 맑아보였고 하얀 돌로 만들어진 길은 더 하얗게 보였다. 오가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역시나 벨렘을 걸어서 가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탁 트인 곳에서 강을 끼고 걸으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니 스트레스도 풀리고 기분이 좋았다.


두 시간 가까이를 걷고 또 걸어 드디어 벨렘 지구에 도착했다. 듣던 대로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웅장했다. 건물은 엄청나게 큰데 저 외벽에 빼곡히 들어찬 성인들의 조각은 정말 섬세하고 멋있었다. 하지만 더 둘러볼 기력도 없이, 그늘도 없는 뙤약볕에서 오랜 시간을 걸으니 물이 너무 마시고 싶었다. 슈퍼마켓을 찾고 또 찾았지만 일요일이라 그런지 죄다 문을 닫았다. 정말 이럴 때는 한국이 너무나도 그리워진다.

결국 참다 못해 스타벅스로 들어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벤티 사이즈로 시켰다. 잔고는 모르겠고, 일단 사는게 먼저였다. 빨대를 입에 대자마자 반 정도를 바로 흡입해버렸다. 좀 숨을 돌리고 나니, 이 스타벅스 바로 옆이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에그타르트 가게 'Pasteis de Belem'인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사람이 많다 싶더라.


냉큼 줄을 섰는데, 도저히 줄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30분을 넘게 기다렸을까, 아직도 자리에 앉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기다린 만큼 더 기다려야 하는 듯 했다. 너무 힘이 없기도 했고, 이 정도 기다려서 먹어야 할 만큼 맛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원조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이미 다른 곳에서 먹은 에그타르트도 너무 맛있었기 때문에, 어디서 먹으나 거기서 거기일 것 같았다. 그냥 내일 리스본 시내에 있는 에그타르트 맛집 탐방을 하자고 마음먹으며 결국 그냥 지나쳐왔다.


저 멀리 벨렘 탑이 보인다. 그 앞에도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지쳐서 조금 쉴 생각으로 앉은 공원에서 보기만 해도 행복한 장면을 눈에 담았다. 아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엄마, 그리고 그 옆의 오빠는 자신의 큰 모자를 동생에게 씌워주고 있다. 그 모습을 아빠가 카메라로 담는다. 멀리에서는 어린 형제가 축구를 하고 있다. 5살 남짓한 자그마한 동생이 찬, 그저 천천히 데굴데굴 굴러갈 뿐인 공을 형이 잔디밭에 몸을 던져 끌어안는다. 완벽한 스트라이커와 골키퍼였다. 여행의 마지막 장을 이렇게 소소한 행복과 흐뭇함으로 스윽 물들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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