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냐 성에서 내려와 드디어 호카 곶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드디어 이 버스에서 내리면 이 여행의 결승선을 밟는거구나' 라는 생각에 심장이 주체를 못 하고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잠이 들었고.. 잠시 뒤에 깨 보니 어느 새 창 밖에는 드넓은 대서양이 펼쳐져 있었다. 동해바다에서 출발해 비행기 없이 버스, 기차, 페리만 타고 대서양이 보이는 이 곳까지 와버린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리고 저 멀리에 호카곶의 트레이드마크, 여기가 유라시아의 최서단임을 알리는 십자가 모양의 커다란 비석이 보였다. 맞바람을 맞으며 뚜벅뚜벅 걸어갔다. 왠지 모르게 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여기구나. 이렇게 끝이 나는구나, 더 이상 가고 싶어도 나아갈 곳이 없구나.


양 옆에는 이렇게 깎아지른 듯 가파른 절벽이 있고 그 아래로 대서양의 파도가 수없이 부딪히고 있었다. 마치 한국의 남해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주변은 나무가 거의 없는 너른 들판인데다가 바닥에 키 작은 다육식물 같은 것만이 즐비했다. 난 이런 들판을 좋아한다. 나무가 많은 풍경은 한국에서 많이 봐서 그런지, 시야에 방해되는 것 없이 탁 트인 공간을 좋아하는 편이다. 이 곳에서는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광활하고 날 것의 느낌이 났다.


이 십자가 비석 앞에는 기념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게다가 관광버스를 타고 온 중국이나 한국의 단체 관광객들이 우루루 내려 주욱 길게 줄을 서고 한참동안 사진을 찍어댔다. 유심히 보니 사진을 찍고 나서 한 10분 정도 둘러보고 그대로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것 같았다.

사람이 조금 없는 틈을 타서 나도 사진을 찍고 싶었다. 사실 나는 내 사진을 찍는 것을 정말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서, 누가 굳이 찍어준다고 먼저 말을 하지 않는 이상 내 사진을 찍은 적이 거의 없다. 아마 세 달 동안의 여행 중에 내 전신이 나온 사진은 채 다섯 장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만큼은 정말 기념 사진을 남겨야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여행 내내 누구에게 내 사진을 좀 찍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그런지 사진을 찍어달라는 말이 입 밖으로 채 나오지 않았다. 나도 좀 놀랐다. 그게 무슨 어려운 부탁이라고 그렇게 망설이는지. 그러나 정말로 나는 그 말을 하지 못해서 30분동안을 비석 주위에서 서성댔다. 누가 먼저 '사진 찍어 드릴까요?' 라고 말을 건네주길 기대하면서.

그러나 모두 자기 사진을 찍기 바쁜 와중에 남이 서성대는 걸 보고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먼저 말 할 사람은 없었다. 결국 기다리다 지쳐 심호흡을 하고 한국인으로 보이는 내 또래 여자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얼마나 흔쾌히 그러겠다고 하던지, 망설인 내가 바보같아질 정도로 말이다. 내 모습은 멋있게 안 나와도 좋으니 여기에 내가 왔었다는 사실만 남기기 위해 딱 한 장만 찍고 내려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분은 자꾸 포즈를 다르게 취해보라고 하면서 여러 장을 냅다 찍어댄다. '브이 해보세요, 브이!' 하면서.

뒤에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많아서 대충 포즈를 취하고서 내려왔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후 사진을 확인해 보니,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머리가 다 날려 제대로 된 사진이 없었다. 그래도 어려운 미션 하나를 완수해 내서 뿌듯했다. 이게 뭐라고.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오랜 시간 안 해버릇 하면 정말 힘들어지는 게 있다. 특히나 말하는 게 그런 것 같다. 여행지에서 생판 모르는 남에게 사진 찍어달라는 말 보다는 부모님에게 사랑한다고 하는 게 어찌 보면 더 쉬울 텐데도, 그건 정말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인파를 등지고 해안가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져온 담배를 꺼냈다. 동해항에서 출발하기 전에, 한국에서 청포도 맛 담배 두 갑을 샀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그렇게 특이한 맛의 담배를 팔지를 않았다. 그래서 무언가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잘 한 일이 있거나, 어떤 고비를 넘겼거나, 무언가를 해 냈을 때에만 그 담배를 피우기로 했다. 나에게 주는 일종의 상 같은 의미로 말이다. 한 2-3일에 한 개피씩 저걸 피우다가, 마지막 이 호카곶에 도착해서 피우려고 딱 한 개피를 남겨두었다. 그걸 꺼내서 불을 붙이는 순간, '정말로 끝났구나' 라는 생각에 왈칵 울음이 나올 뻔 했다. 빠르게 타들어가는 담배가 야속하기만 했다. 담뱃갑이 비워진 걸 보고 정말 결승선을 밟은 느낌이 들어, 바위에 걸터앉아 한참동안 이 곳을 눈에 담았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호카곶은 여름에도 날씨가 좋은 날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한다. 이 곳을 구름 한 점 없을 때 오게 된 것은 정말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곳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던 것 또한 큰 행운이었다. 이 풍경을 바라보며 정말 멋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게 정말 여기가 원래 멋있는 곳이라서 그런건지, 좋은 날씨를 내려 준 행운 때문에 그런건지, 내가 힘든 길을 거쳐 와서 그런건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 곳은 멋있었고, 나는 이 곳을 즐길 자격이 있었다. 아마 여기에 와서야 여행 중 처음으로 내 스스로에게 '멋진 놈, 대단한 놈'이라는 칭찬을 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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