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 있는 이 대륙의 최서단, 호카 곶. 이 여행의 첫 발을 내딛은 그 날로부터,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꿈에 그리던 곳이다. 이제 드디어 그 곳에 가는 날이다.

모든 감정은 복합적이다. 슬프면서 행복하고, 걱정이 되면서도 기쁘고, 대부분의 감정은 그런 것이다. 여행을 하면서도 내내 그랬다. 배고파서 짜증이 나면서도, 어쩌면 누군가 너무도 부러워 할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도 하며, 날씨가 좋다는 사실에 기쁘기도 했다. 순수한 한 가지의 감정에만 휩싸이는 날은 없었다. 비록 마지막 날은 아니지만, 이 여행의 상징적인 마지막 목적지에 가는 오늘도 그랬다. 마지막 날 만큼은 마냥 설레기만 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호카 곶과 신트라, 카스카이스 등을 모두 하루에 돌아볼 수 있는 통합 티켓을 사지 않고 더 싸게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리저리 찾아봤지만, 그냥 통합 티켓을 사기로 했다.

호시우 역에서 기차를 타고 신트라 역에서 내렸다. 보통은 페냐 성과 무어인의 성을 둘 다 둘러보고 호카 곶으로 간다는데, 입장료가 비싸고 시간도 애매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신트라 역에서 페냐 성으로 가는 버스가 있긴 했는데 그냥 걸어서 가기로 했다. 버스비가 아까운 것도 있었지만, 걸어가야만 볼 수 있는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로 가득 찬 신트라 역 앞 인파를 헤치고 페냐 성으로 가는 샛길로 들어섰다.


걸어서 페냐 성을 가려는 사람들은 아예 없어 보였다. 주택가를 지나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거의 나 혼자 걸어갔다. 주택가에는 이렇게 파스텔톤으로 된 집이 많았다. 이 집은 분홍색, 그 옆엔 민트색 같은 초록색.. 각자 집마다 특색이 있었다. 햇볕이 쨍해서 땀을 뻘뻘 흘리기도 했지만 조용한 마을을 혼자 걷는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이럴 땐 괜시리 현지인이 된 느낌이 난다. 이 주택가에서 어딘가 내 집을 찾아 들어가야 될 것만 같다.

페냐 성 입구에 도착하니 표를 끊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서 있었다. 포르투갈에 온 이후로는 어딜 가든 사람이 그렇게 많지가 않아서 줄을 서 있는 것도 별로 못 봤는데, 역시 유명한 관광지다웠다. 10.5유로나 되는 거금을 주고 표를 샀다. 과연 이 정도 돈 값어치를 할 만큼 예쁠까..? 생각하며 성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우와! 솔직히 멋있었다. 한 단어로 이 곳을 본 느낌을 말한다면, 정말 '색다르다'. 아무리 모양이 예쁘고 멋있게 지은 성이라고 해도, 이렇게 알록달록하고 원색에 가까운 색으로 칠해진 성은 그동안 본 적이 없었다. 파란 하늘 아래 빨간색과 노란색으로 뒤덮인 성을 보고 있자니, 그냥 내내 신기했다. 유럽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이런 익살스런 모양의 장식도 있었다.


성의 뒤편으로 가니 장난감 성에 있을 법한 모양의 귀여운 시계탑도 있고, 이런 창문같은 것도 있었다. 저 창문 밖으로 보이는 곳이 바로 호카 곶 너머 대서양이다. 여기 이 창문에서 저 대서양을 보고 나서부터 마치 벌써 호카 곶에 온 것 마냥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빨리 저 땅 끝으로 가 보고 싶었다.


성 한 쪽 구석에 저렇게 기둥을 빙 둘러 갈 수 있는 좁은 길도 있었다. 두 사람이 같이 지나가기도 힘들고, 난간도 내 허리 높이까지밖에 오지 않는 무서운 곳이다. 왠지 스위스에서 가지 못한 그 암벽 위의 길이 생각나서 한 번 걸어보기로 했다. 스릴도 있고 여기서 보이는 전경도 멋있기는 한데, 정말 위험해 보였다. 진짜 까딱하다 난간 밑으로 떨어지면 그대로 페냐 성을 떠돌아다니는 귀신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기 산 위에 보이는 회색 성이 무어인의 성이다. 직접 가 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무어인의 성은 투박하고 별로 볼 것이 그렇게 많지 않은, 그냥 성터 정도라고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저 곳을 내려다 보는 것은 또 나름 운치가 있었다. 생각해 보니 만약 무어인의 성에서 페냐 성을 바라보면 어땠을지. 알록달록한 성이 산 위에 우뚝 솟아있는 것을 멀리서 보는 것도 나름 멋있지 않았을까?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알바이신 지구 언덕에 올라 해질녘에 알함브라 궁전의 전경을 봤던 것처럼 말이다.


성 안에는 작은 기도실 같은 곳도 있었다. 천장의 높이가 가늠도 안 갈 정도로 높은 큰 규모의 성당에서 내 키의 몇 배만한 큼지막한 스테인드글라스만 보다가, 이런 작은 것을 보니 더 정감이 가고 예뻤다. 찬찬히 뜯어보았다. 무조건 크고 화려한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내려가는 길에는 꽃이 많았다. 특히 내 손바닥만한 크기에다 꽃잎도 엄청 많은 큰 꽃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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