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면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상상했던 것이 있다. 이 여행의 마지막이 다가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목표로 했던 유라시아 최서단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대서양을 바라볼 때의 기분 말이다. 결승선을 뚫는 마라토너처럼 후련할까? 혹은 아쉬울까? 신이 날까? 여행 내내 상상만 했던 그 마지막의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포르토를 떠나는 날, 버스를 타러 가는 아침에는 비가 내렸다. 숙소에서 버스터미널은 걸어서 3-40분 정도가 걸리는 꽤 먼 거리에 있었다. 우산을 쓰고 포르토의 거리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으며 터덜터덜 걸었다. 비도 오고, 평일 아침이라 그런지 거리는 휑했다. 다양한 색깔을 담고 있는, 그래서 삼일만에 사랑에 빠지게 된 이 도시는 비가 오는 날이면 완전한 회색을 품는 듯 했다. 포르토에 있었던 내내 날씨도 좋고 어딜 가도 사람이 많았어서 그런지 이 곳에서 어제까지 느꼈던 것과는 다른 어색한 우울함이 밀려들었다.

버스터미널은 넓은 물류창고같은 곳에 있었고, 여타 버스터미널처럼 흡연이 가능했다. 몸도 축축 쳐지고 우울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꺼낼 때 조금 떨어져 있던 네다섯살 즈음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눈에 밟혔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유모차 밀면서도 담배 피우는데 뭐' 하면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마저 불을 피웠다. 담배연기가 내 주변을 천천히 머물다 그 여자아이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아이는 찡그린 표정을 지으며 엄마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아득해졌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의 아이들 주변에서 부모가 담배를 피우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나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흡연에 관대한 유럽에 있을지라도, 주변에 어린아이가 있으면 담배를 피우지 말자고 굳게 마음을 먹고 있었다. 유럽의 어린아이라도 담배 냄새를 맡지 못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런데 내가 반 정도 밀폐된 공간에서, 아무리 흡연구역이라지만 주변에 어린아이가 있는 것을 봤음에도 담뱃불을 붙였다니. 이 여행이 길어질수록 점점 여행이 아닌 일상처럼 느껴져서인진 모르겠지만, 완전히 다른 문화 속에서 잠깐 산다는 것이 이렇게나 특별한 일인 줄 몰랐다. 모르는 사이에 나의 가치관을 일부나마 이렇게 변화시킬 만큼이니 말이다.

가끔 이렇게 자기 자신을 보면서도 마치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 같은 어색한 기분이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말이다. 사실 이 담배 사건의 경우로 마주하게 된 내 모습은 좋은 쪽으로 변한 건 분명히 아니다. 부끄럽고, 내 자신에게 조금은 실망하게 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역설적으로 이런 순간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자아성찰과 자기반성은 그 누구든 하기 어렵다. 그래서 내게 이런 순간이 오면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찬찬히 고민해본다. 사람은 변하기 힘든 존재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나이가 든 사람들도 매 순간 성장하고 변해간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성장하는 나를 알아채고 마주할 수 있는 이런 소중한 순간들은 절대 자주 오지 않는 선물같은 것이다. 상처 없는 성장은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죄책감에 반 정도밖에 못 피운 담배를 끄고 버스에 올라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흡연에 대한 생각이 그렇게 변한 것처럼, 여행 동안에 다른 뭔가가 변한 건 없을까? 웬만하면 좀 긍정적인 것으로. 글쎄..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외로움과 고독을 조금 더 잘 참을 수 있게 된 것 정도? 원래 이런 건 굳이 생각하려면 잘 생각이 안 난다. 아무렴 괜찮다. 내가 아직 알아채지 못한 것일 뿐, 세 달 가까운 여행을 하며 분명히 달라진 것이 있을테니까.


드디어 마지막 도시 리스본. 마지막에 다다른 것을 스스로 자축하려고 숙소 주변에 있는 괜찮은 뷔페 식당도 알아놓았다. 체크인 하고 짐만 풀고 나와서 바로 즐거운 식사를 즐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완전히 어긋났다. 그 동안 부킹닷컴에서 숙소 예약을 해왔었는데, 숙소 예약을 미리 잡아놓았다가 바꾼 곳이 몇 군데 있다. 리스본 숙소도 한국에서 미리 예약을 했다가 약 한두 달 전에 다른 곳으로 바꿨었다. 그런데 그 예약이 제대로 처리가 안 된 모양이었다. 분명히 내 부킹닷컴 예약 페이지에는 예약이 완료되었다고 뜨는데, 그들의 시스템에는 내 예약 요청이 들어가지 않았고 이미 숙소에 빈 자리는 없었다.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그들은 나에게 조금 기다려달라고 한 후 자기네들 예약 시스템을 확인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그 동안 나는 내가 예약한 (하지만 묵지는 못할) 숙소를 둘러보았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고, 한국인으로 보이는 투숙객도 있었다. 방도 매우 깔끔해 보였다. 여기서 묵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돌아온 호스텔 직원은 아무리 봐도 자기네들에게 예약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전했을 뿐이었다. 그럼 당장에 묵을 곳이 없는데, 내 잘못도 아닌데 내가 어떻게 해야되겠냐 라고 물으니, 주변에 다른 숙소를 대신 알아봐 주겠단다. 열심히 이곳저곳 전화를 걸더니 새로운 숙소를 구했다면서 그 곳을 소개시켜 주었다. 내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 왜 내가 이런 귀찮음과 불편을 떠안아야 하는지. 하지만 누구에게 따져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따질 힘도 없었다. 그저 그 호스텔 직원에게 수고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새로 알려준 숙소로 향할 뿐이었다.

새로운 숙소는 인도인이 운영하는 낡은 숙소였다. 내가 영어에 능숙한 편도 아니어서 내 말을 받아주는 사람도 영어를 잘 하지 못하면 의사소통이 조금 힘들다. 이 인도인과도 영어로 얘기하는 게 좀 어려웠다. 하지만 사람은 좋아보여서 대충 눈짓과 웃음으로 뜻은 통했다.

숙소는 좁았고 더웠으며 사람도 많아서 외국인들의 체취로 가득했다. 게다가 얼마나 떠들어대는지 쉬고 싶어도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빨리 찾아놓은 뷔페에 가고 싶었다. 짐만 풀고 밖으로 빨리 나왔다. 숙소 문제로 한참을 골머리를 썩이고 나니 어느 새 저녁이 다 되어 있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 음식을 흡입하다시피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내에는 빨래 시설이 없고 숙소 근처에 코인빨래방이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코인빨래방을 이용해 보았다.


같은 방을 쓰는 외국인들은 내가 잠이 든 늦은 밤에 돌아왔다. 잠귀가 밝아서 그들이 들어오는 소리에 깼는데 계속 소근거리며 떠들길래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안 와서 새벽에 담배를 피우러 나간 건 처음이었다. 다시 들어와 어떻게 잤는지도 모른 채 잠들었다 느즈막히 일어나보니 빨래가 잘 말라있어서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먼저 리스본의 중심인 코메르시우 광장으로 갔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햇볕은 따가워서 살이 다 탈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며칠 전부터 슬슬 아파오던 엉덩이에 제대로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그냥 엉덩이가 아니고 사실 (항문)에 문제가 생겼다. 완두콩 크기만한 뭔가가 그 곳에 나서 걸을 때마다 쓸리는 느낌이 들었다. 미치도록 더운데다가 제대로 걷지도 못해 컨디션이 슬슬 최악으로 떨어져가고 있었다. 저 완두콩만한 저게 뭘까 너무 궁금해서 네이버에 계속 검색을 해 보았다. 의사의 진단은 없었지만 아마도 '혈전성 외치핵'이라는 것 같았다. 스트레스에 의해 급성으로 생길수도 있다고 하는데.. 이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가. 샤워 할 때마다 따뜻한 물로 그 곳을 오랫동안 공격주라길래 이 날부터는 샤워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


무작정 걸었다. 구글 맵에 생각나는 곳을 찍고서는 언덕이 있든 어떻든 그냥 걸었다. 리스본은 언덕이 많기로 유명한 도시다. 단순히 많은 것 뿐만 아니라, 언덕에 오르면 이렇게 빨간 지붕으로 덮인 리스본의 전경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마침 언덕 위에 그늘이 진 공원이 있길래 조금 쉬다 가기로 했다. 벤치 옆에는 노래를 꽤 잘 부르는 버스킹 뮤지션도 있었고, 조그마한 나무 수레를 끌고 와서 레몬에이드를 만들어서 파는 사람도 있었다. 더워서 갈증도 나고 상큼한 게 먹고 싶어서 저 작은 레몬에이드 한 잔을 무려 2유로나 주고 샀다. 사고 나서 내가 미친 짓을 한 건가 잠깐 후회가 되었지만 맛만큼은 최고였다. 저 할아버지의 노래를 들으며 언덕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걷고 또 걷고. 언덕이 많아서 걸어다니기 지친다. 그래서 리스본의 골목골목엔 이렇게 전차와 트램이 다닌다. 가격이 꽤 비싸서 종일권을 끊고 타고 다니는 건 엄두도 못 냈지만, 그래도 저렇게 귀여운 트램이 지나가는 걸 볼 때면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트램들은 겉은 물론이고 안에도 온통 예전의 디자인을 고집하고 있었다. 나무로 된 손잡이와 의자 등등. 그래서 더욱 시간을 넘나드는 기분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리스본 하면 또 에그타르트를 빼놓을 수 없다. 네이버에서 리스본 에그타르트 맛집을 찾아 에그타르트 투어를 떠났다. 솔직히 정말 어디를 가든지 다 맛있었다. 기껏해야 한 개당 1.3유로 정도를 넘지 않는데, 우리나라에서 3~4천원에 파는 고급 에그타르트와는 비교도 안 되는 부드러움과 달콤함으로 꽉 차 있었다. 야외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에 에그타르트를 시켜 먹으면서 여유를 즐기는 시간이란... 정말이지 이 곳의 에그타르트는 잊을 수 없다. 게다가 슈퍼마켓의 제빵 코너에서도 개당 단돈 0.19유로에 에그타르트를 팔고 있었는데, 이것도 나름대로 그럭저럭 먹을 만 했다.


사실 진짜 밥이 너무나도 먹고싶었다. 밥. 한국에서 먹는 갓 지은 고슬고슬한 맛있는 밥이 아니라도 좋으니, 입 안에서 익숙한 알갱이가 돌아다니는 그 느낌을 너무나도 느끼고 싶었다. 다행히 포르투갈은 스시를 파는 식당이 많았다. 리스본에서 5박을 했는데, 그 중 4일 저녁을 초밥 뷔페에 갔다면 믿기는가? 이제 남은 여정도 없고, 그동안 티끌 모으듯 아꼈던 돈을 스시 뷔페에 전부 탕진해버렸다. 하지만 전혀 후회는 하지 않는다. 정말이지 머리에 초밥먹는 연가시가 든 것 마냥, 어딘가에 홀린 사람처럼 매일 밤 미친듯이 스시를 먹어댔다. 먹어도 먹어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리스본의 언덕에서 본 저녁 풍경이다. 붉은 어스름에 빨간 지붕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온 도시가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흘러넘치는 감성에 한껏 취했다. 뭔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같지만, 뭐 어떤가. 리스본의 언덕에 올라 이 붉은 빛으로 물드는 도시를 목격했다면 리스본이라는 도시를 충분히 즐겼다고 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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